▲기무치, 기무치소스, 카쿠테키(깍두기) 등 동네 슈퍼에 진열된 한국 식품들. 그러나 모두 그림의 떡이다.
김경년
슈퍼에서 발견한 기무치에 상처 받다
첫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들렀던 동네 슈퍼에서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통에 든 '기무치'를 한 통 구입했다. 요샌 일본 사람들도 김치를 많이 먹는다더니 동네 슈퍼에서도 팔 정도구나, 하며 반가웠다.
이튿날 저녁 '기무치'를 처음 개봉했다. 순간 내 혀를 의심했다. 세상에 이런 김치도 있나. 들큼하고 시큼한 맛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게 내가 한국에서 먹던 김치가 결코 아니란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한번은 슈퍼에서 '기무치찌개용 기무치'라고 쓰인 비닐상품을 발견하고 "지난 번 기무치는 잘못된 거겠지, 이번엔 다를 거야"라고 생각하고 샀다가 집에 와서 열어보고 그냥 다 버린 경험도 있다. 냄새가 지난번 거랑 거의 똑같은 데다 이번 거는 기무치도 아니고 기무치찌개 '국물'이었던 것. 봉투에 가타카나로 씌어 있는 '소스'란 글씨에 주의하지 못한 결과다.
요즘 일본의 웬만한 식당에는 반찬으로 기무치를 서비스하는 곳이 많다. 물론 돈을 따로 받고. 우리나라 김치가 바다를 건너가 기무치가 돼서 일본 사람들 밥상에 뿌리를 내리다니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겐 그림의 떡이다. 김치에 설탕 듬뿍 뿌린 것처럼 단내가 풀풀 나는 걸 어떻게 먹나.
도쿄에는 김치찌개, 육개장, 순두부찌개, 갈비탕 등 한국 음식만 파는 한국식당도 많고, 한글로 '짜장, 짬뽕' 간판을 내걸고 장사하는 중화요릿집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잘 가지 않는다. 맛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가게 주인장들은 한결같이 "우리 집은 한국에서 하는 것하고 똑같이 만들어요"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난 "정말 그렇네요" 하고 맞장구쳐주지만 솔직히 아니올시다다. 김치찌개를 주문하면 모양은 그럴 듯한 데 뒷맛이 쓰고, 갈비탕을 시키면 뽀얀 국물의 짜디짠 곰탕이 나오기 일쑤다.
이 분들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내줄 리는 없다. 일본에 오래 살다 보니 주방장의 입맛이 변했거나, 일본인 손님들이 많으니 그들의 입맛에 맞춰온 결과겠지. 아무래도 식재료가 다르니 잘 해보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면도 있겠다 싶다.
서울 살 땐 한식, 일식, 중식 가리지 않고 뭐든지 잘 먹었고 외국에 가서도 음식 때문에 고생해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처음 먹어본 기무치에 받은 트라우마가 그렇게 컸나. 한국 여행객들이 맛있다고 난리인 일본 음식도 아직까지 극소수를 빼놓고 손이 가지 않는다. 라멘, 우동, 소바... 서울에선 맛있던 것들이 왜 그리 맛없어졌을까. 그러고 보니 서울에선 없어서 못 먹던 스시, 사시미도 여기 와선 별로 당기지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