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신 동상1938년에 흑석동에 처음 지어진 건물 영신관 앞에는 중앙대의 실질적 설립자 임영신의 동상이 있다.
김학규
중앙대에 들어가면 잔디밭 건너편에 오래돼 보이는 건물이 보인다. 중앙대가 흑석동에 처음 자리 잡을 때인 1938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위기에 몰린 중앙보육학교를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임영신이 1935년 인수한 후 흑석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때 처음 지어진 건물을 임영신의 호를 따서 '영신관'이라고 부른다. 건물 앞에는 임영신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임영신은 사실상 중앙대를 설립한 인물로 평가받는데, 정확히는 1935년에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고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게 한 인물이다.
임영신은 1919년에 전주와 천안에서 3.1혁명에 참여한다. 1918년 전주 기전여학교를 졸업한 임영신은 곧바로 천안에 있는 양대소학교의 교사가 됐는데, 다음 해 3.1혁명이 시작되자 3월 12일 전주시내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섰다가 일경에 잡혀 온갖 고문을 받은 후 징역 7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해 6월에 가석방될 때까지 3개월간 감옥 생활도 한다.
임영신은 감옥에서 나온 후 몰래 일본으로 가서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를 다녔다. 1921년에는 귀국해서 공주 영명여학교의 교사가 되고, 그후 이화학당의 교사로 출강하다가 192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때 임영신은 미국에서 이승만을 만나게 되는데, 이승만의 견해에 깊이 공감하면서 이승만이 죽을 때까지 평생 그를 돕는 역할을 하게 된다. 1931년 임영신이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승만이 제3자를 통해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임영신 나이가 32세일 때인데,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56세였다. 임영신은 고심 끝에 "저는 조선의 독립과 결혼하겠어요!"라면서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임영신은 1936년 말 중앙보육학교의 운영자금을 모으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간다. 이때 한순교와 결혼하지만, 곧 파경을 맞는다. 1940년에 귀국한 임영신은 1941년 12월 13일 발족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에 중앙보육학교의 대표로 참여한다. 하지만 임영신은 김활란, 모윤숙 등과는 달리 소극적으로 활동한 인물로 분류된다.
해방 후 임영신은 김활란, 박현숙, 최은희, 이은혜 등과 함께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될 때는 초대 상공부장관을 지냈으며, 1949년에 치러진 안동 보궐선거에서는 장택상을 물리치고 당선해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이승만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임영신은 1952년과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임영신의 호가 '이승만이 머무는 집'이라는 뜻이 담긴 승당(承堂)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1959년에 세워진 중앙대중앙도서관의 처음 이름은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기념도서관'이었다.
중앙보육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박차정
중앙보육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이름을 남긴 인물은 많이 확인되지 않는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발굴되지 않은 이유와 관련된 것인지는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
다만, 경남 양산시에서 제공하는 '디지털양산문화대전'의 양산유치원 편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나와 주목된다.
"1923년 2월 8일 양산 유지들의 발기로 청년회관에서 양산유치원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중략) 서울 중앙보육학교에서 내려온 2명이 교사로 일했다. 그 중 1명인 여성운동가 박차정은 동래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인 김약수·김두봉과 친척이었고, 김원봉의 아내였다."(디지털양산문화대전, 양산유치원 중)
독립운동가 박차정(1910~1944)이 중앙보육학교에서 내려와 양산유치원의 교사를 했다는 내용이다. 박차정은 1929년에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중앙집행위원도 지냈는데, 이때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930년 1월 서울에서 전개된 여학생 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다가 허정숙과 함께 구속되기도 한다. 이때 참가학교는 이화, 숙명, 배화, 동덕여고와 근화, 실천, 정신, 태화여학교, 그리고 여자미술, 경성여자상업, 경성보육학교 등 11개 학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