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어느 수준에 오르면 불평등이 감소하기 시작한다고 주장하는 쿠즈네츠 곡선. 쿠즈네츠 본인도 이 그래프의 근거가 빈약함을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경제학자들은 불평등 문제만 나오면 이 그림부터 내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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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 성장이라는 성과지표를 떠받드는 경제학자들이 이 발견으로 무엇을 했을까? 그렇다. 경제성장이 모든것의 해답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이 증가하는 이유는, 아직 우리 경제가 쿠즈네츠 곡선 꼭대기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경제성장에 채찍질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불평등이 줄어들 것이므로, 경제성장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된다.
이 곡선이 마치 법칙이라도 되는 듯이 너도 나도 인용해대자, 쿠즈네츠는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이 곡선은 서구 일부 국가에서 발견된 현상일 뿐이고, 통계에 포함된 시기도 매우 협소하므로, 일반화하기 어렵다고 말이다. 그
러나 통계로 거짓말을 할 때 누구나 그러듯, 경제학자들은 주석을 빼고 곡선만 여기저기 퍼날랐다. 성장이냐 분배냐를 토론하는 곳에 가면, 이야기가 쿠즈네츠 곡선에서 시작하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1990년대 초, 미국 경제학자 진 그로스먼과 앨런 크루거는 굉장한 규칙성을 발견했다. 약 40개국의 GDP 추이와 각국 내 지역의 공기 오염, 수질 오염 데이터를 나란히 놓고 연구하던 중에, GDP가 증가하면서 처음에는 오염도 증가하더니 그 다음에는 감소해 그림처럼 거꾸로 뒤집힌 U자의 모양을 그리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242쪽).
이것이 이른바 '환경 쿠즈네츠 곡선'이다. 경제성장이 분배 불평등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까지 개선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에 대한 해설도 같다. 경제성장으로 인해 사회가 어느 수준에 이르면, 불평등과 마찬가지로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케이트 레이워스가 주장하는 도넛의 안쪽 문제와 바깥쪽 문제 모두가 경제성장에 의해 해결된다는 것이 주류 경제학계의 입장이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불평등과 환경 파괴를 넘어서
쿠즈네츠 곡선이 사실과 다르다는 사실은 쿠즈네츠 본인도 인정했지만, 더 체계적인 반박은 토마 피케티에게서 나왔다. 그의 책, <21세기 자본>과 <세계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 불평등은 현재 추세가 역전되지 않을 경우 곧 사상최고에 이를 전망이다.
2015년 현재 전 세계 부자의 상위 1%는 나머지 99%의 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이 가졌다 (13쪽).
환경 문제 또한 다르지 않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교토의정서는 실패했다. 독일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감축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보다 훨씬 완화된 파리 협약이 비준되었지만, 2017년 6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이 탈퇴했다. 파리 협약이 지켜진다고 하더라도 지구 온난화는 당분간 멈추지 않는다. 그동안 쌓아 놓은 온실 가스가 앞으로 수십년 동안은 지구를 덥히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불평등과 환경 문제에 대해 경제학자들, 더 나아가 우리 세대 전부가 외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래 세대가 어떻게 되든, 별 체감이 되지 않는다. 케인즈도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장실패와 승자독식의 경제 환경의 기저에는 금융구조가 있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은 성공적인 양적 완화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최악의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방어했다고 자축했다.
과연 그럴까? GDP 성장률이 나쁘지 않게 나왔을 뿐, 금융위기의 여파는 많은 사람들을 극단적인 절망으로 몰아 넣었다. 중앙은행이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양적 완화는 가진자들의 배를 불렸을 뿐이다. 그렇게 1%가 더 많이 가져가면, 평균값으로 구해지는 1인당 GDP는 올라간다. 중위소득이 떨어지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빈곤선 이하로 곤두박질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