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표지
문예출판사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미래는 디스토피아로 그려지기도 하고 유토피아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도 현대 생명공학 및 인공지능 기술 분야에서 제기되는 과학기술의 윤리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소설로 시작해 영화, 만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입니다. 이 소설의 작가 메리 셸리는 생명을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나온 지 200년이나 지난 책인데도 최근 현대 과학분야에서 일어나는 윤리 논쟁에 바로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작품입니다. 그렇기에 고전이라 불리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읽는 것이겠지요.
각고의 연구로 여기저기서 부분 부분을 모아 조립한 거대한 신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인조인간을 만든 인물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창조한 메리 셸리는 적정한 선을 넘는 지식과 기술을 추구한 결과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경고합니다.
메리 셸리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를 창조하게 될 때 일어날 수 있는 극단적 상황을 상정했습니다. 그녀는 멈출줄 모르는 창조 열망을 가진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들어낸 피조물을 창조자 자신도 공포를 느낄 정도의 괴물로 그렸습니다.
메리 셸리는 도를 넘는 창조 열망을 괴물같은 존재를 만들 수 있는 위협으로 봤던 것이겠지요. 핵무기와 같은 현대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미친 충격적 경험을 고려한다면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 현대의 과학기술자들은 작품속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을 얻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자신의 자질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위대해지려고 열망하는 것보다 자신의 고향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더 행복한지를 배우기 바란다."(58쪽)
메리 셸리의 이 소설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많은 장르의 작품들이 만들어져왔기 때문에 소설의 줄거리를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작품속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통해 메리 셸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오늘날 과학기술분야 연구자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은 얼마나 진보했을까?
메리 셸리 시대의 인간과 2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인간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인류는 점점 나아지는 방향으로 발전해 오긴 한걸까요? 작가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한 괴물의 눈을 빌려 인간을 바라봅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을 창조했을 때 이 피조물이 처음부터 괴물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외모만을 보고 괴물이라 두려워하거나 무턱대고 자신을 공격하는 인간들을 만나 고통을 경험하며 괴물이 되어 갔습니다.
괴물은 인간들을 피해 달아나다 발견한 오두막에서 한 가족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이들을 관찰하며 인간에 대해 배워갑니다. 그는 이 가족을 관찰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하고 이 가족의 가난과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가족들을 돕기도 합니다.
인간들로부터 이유없는 핍박을 받았지만 이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소통의 희망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수용될 자신을 기대하기도 하지만 인간 세상에 대한 정보들을 알아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토록 강하고 고결하고 훌륭한 인간이 그렇게 사악하고 비열하단 말인가? 인간은 어떤 때는 순전히 악의 근원에서 태어난 자식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고귀하고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이기도 했소. (중략) 오랫동안 나는 한 인간이 어떻게 동족을 죽일 수 있는지, 심지어 법과 정부 따위가 왜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소. 하지만 악과 살육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품었던 의혹은 사라지고 역겨움과 혐오감이 몰려와 고개를 돌리고 말았소."(153-154쪽)
메리 셸리가 봤던 인간들의 악과 살육의 역사는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지속되어 왔고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 때문에 괴물이 되기로 선택했던 피조물조차 역겨움과 혐오감으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던 역사를 가진 인간들은 메리 셸리의 시대와 비교할 때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요?
프랑켄슈타인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 시대에도 많은 프랑켄슈타인들이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탐구와 창조 열망에 가득찬 생명공학자들과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 시스템을 창조해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싶어하는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대표적입니다.
과학기술 분야에 있는 연구자들은 종종 어떤 기술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 서려고 합니다. 자신은 가치중립적인 기술을 만든 것일 뿐 기술을 활용하는 문제에까지 개입하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과학을 응용한 기술을 만들고 사용하는 것도 사람들입니다.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열망 추구에 대한 책임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특히나 생명을 다루는 연구라면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괴물은 자신의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어찌 생명을 가지고 그렇게 놀 수 있는 거요? 나에 대한 의무를 다하시오. 그러면 나도 당신과 다른 인간들에 대한 본분을 다하겠소"라고 호소합니다.
이런 수준의 생명창조가 가능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공지능의 경우엔 로봇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피조물에게 해야할 의무를 이행하기로 했다면 이 괴물은 분노로 가득차 인간들을 죽이는 대신 프랑켄슈타인의 훌륭한 동반자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현대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의 연구결과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게 될 상황에까지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류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능력들을 썩이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거네. (중략) 감정과 이성을 지닌 존재를 창조해낸 일을 생각하면 나 자신을 평범한 과학자로 생각할 순 없었지. 하지만 내가 과학자로서 첫발을 내디딜 때, 힘을 복돋아주었던 그러한 생각 때문에 지금 내가 먼지 구덩이 속에 깊숙이 처박힌 거네. 나의 모든 생각과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고, 전능함을 갈망하던 대천사처럼 나는 영원한 지옥에 갇히게 된거지. (중략) 나는 천국을 밟는 상상에 빠져들었고 내 능력에 기뻐했고 그 연구의 성과를 생각하며 기쁨에 타올랐지. (중략) 한데 지금 나는 얼마나 몰락했는가!"(283-284쪽)
현대의 프랑켄슈타인들도 인류에게 유용함을 제공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을 썩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메리 셸리의 상상이 매우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최근 점점 가속되는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속도를 보면 충분히 그럴법 합니다. 많은 연구들에 대해서 창조자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창조물을 만드는 수준까지는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합의와 통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지음, 임종기 옮김,
문예출판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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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지치지 말기를. 제발 그러하기를. 모든 것이 유한하다면 무의미 또한 끝이 있을 터이니.
-마르틴 발저, 호수와 바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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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소설인데, 아직도 논쟁적일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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