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47인 예심결정서를 담은 동아일보 기사(1920. 4. 8)3.1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된 사람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과 이면에서 활약한 15인을 합쳐 원래는 48인이었지만, 33인 중 김병조가 해외로 탈출한 관계로 47인이 재판을 받았다.
동아일보
이들은 3.1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기독교계의 핵심 구성원들이었다. 한강인도교 위에서 만난 이들은 민족대표 33인에 들어갈 기독교계 인사를 전형하는 일과 함께 안세환을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일본 도쿄에 파견하기로 하는 결정도 했다.
당시 한강인도교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이기도 했는데, 이들의 한강인도교 회합은 일제의 허를 뚫고 이뤄낸 쾌거였다.
한강인도교에서 만난 8명의 기독교계 인사 중 '이인환'은 이승훈(1864~1930)의 본명이다. 이승훈은 기독교 장로였는데, 3.1만세운동 당시 기독교계의 좌장으로 천도교 측과 교섭 창구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승훈은 이미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은 바 있었는데, 3.1만세운동으로 다시 3년형을 선고받는다. 석방된 이후에도 이승훈은 오산학교 경영에 힘쓰면서 민립대학건립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을 벌이고, <동아일보>가 위기에 몰릴 때는 <동아일보> 사장을 맡기도 했다.
이갑성(1889-1981)은 당시 세브란스의전부속병원 사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의 조직과 연락을 맡았다. 이갑성은 2월 22일부터 25일까지 마산 등지를 돌면서 조직과 연락관계를 정비하고 막 올라온 상황이었다. 이갑성은 3월 1일 당일까지도 김창준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전국에 배부하는 역할을 맡았고, 김원벽(연희전문), 강기덕(보성법상), 한위건(경성의전) 등 학생과 연계망을 가지고 있던 박희도와 함께 학생들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이갑성에게는 또 다른 독립운동가 조경한, 이강훈 등에 의해 일제에 전향해 밀정까지 했다는 의혹이 한동안 제기됐으나, 구체적인 행적을 조사한 결과 문제제기의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됐다. 1940년대 상하이에 나타났던 비슷한 이름의 밀정에 대한 소문이 와전되면서 발생한 오해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3.1절 특집, 누가 변절자인가>, 2005. 3. 1, SBS).
3.1만세운동 당시 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를 맡고 있던 박희도(1889~1952)는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박희도는 정춘수, 최린과 더불어 변절자의 길을 걷는다. 더군다나 자신이 경영하던 중앙보육학교에서 기숙사 여학생들을 상대로 한 '위계에 의한 성폭력' 의혹에 휩싸이는 등 변절자 중에서도 '가장 타락한 분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강진과 이종림, 한강인도교 아래에서 보트를 타고
일제강점기 한강인도교 아래에는 한강에서 유람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보트장이 있었다. 1930년 이곳 보트장에서 만난 두 명의 젊은이도 함께 보트를 타며 한강인도교 아래로 진출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이들의 움직임은 여느 유람객들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듯하면서도 왠지 주위를 살피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 두 명의 젊은이는 단순히 한강 유람차 보트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가운데 강진(김와시리, 1905~?)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 만주에서 입국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던 인물이었고, 이종림(1900~1977) 역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 만주에서 입국해 영등포 외곽에 아지트를 두고 경성제대 반제동맹단 등을 이끌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들은 주위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유람객인 양 보트를 탄 채 한강인도교 아래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방안에 대해 협의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는 급사 등을 조직하여 적우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삐라살포는 물론 경성방직 노동자 파업지원 등의 활동을 펼치다 1931년 성대반제동맹 사건 등으로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경찰의 추적을 받다 강진은 결국 체포되고 이종림은 해외로 탈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