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나루터 예전 표석지금은 이 표석도 철거되고 서울시가 쇠로 만든 표지판을 세워 놓아 노량진 나투터가 있던 자리임을 연상하기 힘들게 되었다.
김학규
노량진 나루터가 있던 이곳에는 1910년 일제에 의해 노량진 정수장이 설치된다. 이때부터 일본인이 많이 사는 멀리 인천까지 배수관이 연결돼 물을 공급하게 되면서 이곳은 노량진 정수장으로도 불리게 된다.
노량진 정수장은 2001년까지 서울시민과 인천시민에게 수돗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이곳에 처음 공원이 조성될 때 이름을 노량진배수지공원이라고 했던 이유도 이런 사연 때문이다. 지금도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남부수도사업소 시설이 남아 있다. 공원 안에는 이 곳에 노량진 정수장이 있었음을 알리는 '노량진 정수장 터' 기념 표석이 제법 크게 설치돼 있다.
노들나루공원에는 한강선방어전투 기념 조형물도 설치돼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한 상황에서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벌어진 한강선 방어전투를 기념해 당시 사망한 국군 이름이 새겨진 배경석과 기념 조형물을 조성해 놨다.
한강선방어전투는 한국광복군 참모장 출신의 김홍일 장군(1898~1980)이 지휘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군 장교로 근무한 1932년 당시 이봉창 의사의 의거,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 때 백범 김구의 지시로 의거에 사용할 폭탄을 제공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한강선방어전투는 전쟁 초기 후퇴하는 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전투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노량진,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
이렇듯 볼거리도 많은 노들나루공원이지만, 그런 구경은 뒤로 미루고 오늘은 정자가 있는 벤치에 앉아 노량진 일대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노량진 일대는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노량진 일대가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된 이유는 노량진 나루터가 들어선 이래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던 지역의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량진 나루터가 활발하게 역할을 하던 시절 노량진은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삼남지방과 통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러한 노량진의 지위는 경인선 개통(1899), 한강철교(1900)와 한강 인도교 설치(1917)로 이어진 근대에도 변함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노량진 일대의 지역주민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획득한 정보에 기반해 높은 정치 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라는 특성으로 인해 노량진 일대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될 수 있었다.
노량진 살던 박양순, 배화여학교 '3.1운동 1주년기념투쟁'의 선두에
1920년 3월 1일 경성 시내는 일제 경찰의 철통같은 경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경성 시민 누구도 1년 전 오늘이 한반도 전역을 뒤흔들었던 만세운동이 시작된 날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일제는 학생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열흘 정도 임시휴교 조치를 내리기도 하고, 3월 1일과 2일 이틀 동안은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의 하나인 천도교의 종교 행사마저 열지 못하도록 조치한다. 1년 전 크게 당했던 일제는 경성 시내에 경찰을 미리 풀어서 이번에는 모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3.1만세운동 1주년기념투쟁'에 끝내 나선 학교가 있었다. 바로 배재고등보통학교와 배화여학교, 신명학교이다. 이때 배화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노량진리(현 노량진동)에 살던 박양순(1903~?)도 배화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나선다.
당시 배화여학교 학생들은 3.1만세운동 1주년을 맞아 기숙사 뒤쪽 언덕과 학교 마당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일제는 학교별로 주모자 수십 명 씩을 연행했다. 배화여학교의 스미스, 배재고보의 아펜젤러 등 두 외국인 교장을 '인가취소' 조치해 교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한다.
이때 박양순도 23명의 배화여학교 동료과 함께 주동자로 몰려 구속되는데, 그해 6월에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고 석방된다. 박양순이 수감돼 있던 서대문형무소 여옥사에는 박양순의 수감 당시 사진이 전시돼 있어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게 해준다.
박양순은 그동안 징역 6개월 이상의 경력자만 가능하다는 보훈처의 규정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2018년에야 규정이 바뀌면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