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사항을 새겨놓은 동판사육신공원 옆에는 김녕김씨충의공파대종회관(백촌빌딩)이 있다. 그 옆에는 충의공김문기사육신현창비가 있고, 바로 그 현창비 옆에 이 동판이 새겨져 있다. 권력에 굴종한 최영희 위원장과 이병도 위원 등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명단도 볼 수 있다.
김학규
그렇다면 "김문기가 세조 때 가려진 6신"이라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견해는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세조 때는 사육신을 비롯해 '단종복위운동'에 나섰던 인물들은 하나같이 충신이 아니라 '난신'이었다.
심지어 세조가 주도한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때 살해된 김종서, 황보인, 조극관, 민신 등도 난신이었다. 따라서 세조 때 사육신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근거로 삼은 세조실록에 따르더라도 1456년의 '단종복위운동'에 나선 인물들의 거명 순서는 일률적이지 않다. 유응부가 포함되든 김문기가 포함되든 특별히 6명을 구분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육신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곳은 세조실록과 같은 정사(正史)가 아니라, 생육신의 한 명인 남효온의 <추강집>이다. 그것도 성종 때 남긴 책이지만 발간하지도 못하다가 그의 외증손 유홍이 선조 때 처음 발간(1576)했다. 이들 육신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도 <육신전>이 포함된 <추강집>이 나온 이후인 선조 9년(1576)의 일이다.
더군다나 김문기는 1456년의 '단종복위운동'에 관련된 인물 중 유일하게 관련 사실을 부인한 인물이었다. <세조실록>의 기사(세조 2년, 1456)를 보면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김문기(金文起)만이 (공초(供招)에) 불복(不服)하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운동이 실패하자 끝내 당당한 모습조차 보여주지 못했던 인물이 바로 김문기였다.
권력에 굴복해 역사를 왜곡한 사람들
사정이 이러니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이 그대로 수용될 리가 없었다. 우선 서울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학술적으로 내린 결정에 따라 처리하고자 하나 '사육신묘'라는 명칭 하에서는 처리할 수 없"다고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1) 김문기 선생을 육신묘역에 봉안할 것인지 여부와 유응부 선생의 계속 봉안 여부, 2)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인사들에 대하여 앞으로 육신묘역에 봉안해 줄 것을 요청해올 경우 이에 대한 대책과 사육신묘역의 명칭 문제"를 검토해달라고 재질의 형식을 빌려 문화공보부장관에게 요청한다.
이에 문화공보부는 국사편찬위원회에 의뢰해 "김문기를 사육신묘에 허묘로 봉안함이 타당하다, 유응부는 현상대로 존치함이 타당하다,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하여 희생된 인사들을 충신사 또는 충신단으로 하여 그 위패를 봉안하는 것도 타당하다"는 입장을 전달한다. 사육신묘를 정비하면서 김문기의 묘가 추가된 사정이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역사를 왜곡한 사람들
반면, 충의공 김문기를 배출한 김녕김씨 (충의공파) 종친회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사항이 나오자 신속하게 움직인다. 종친회관을 사육신공원 옆으로 옮기고 '충의공김문기사육신현창비'를 세웠다. 또한 그 옆에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사항을 동판으로 구체적으로 새겨 놓는다. '가문의 영광'에 걸맞은 대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어도 문제는 정리될 수 없었다. 유응부의 천녕유씨 종친회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고, 이어 (사)사육신현창회에서도 들고 일어났다. 언론에서는 '1977년 당시 권력자였던 김모씨의 압력에 굴복해 사육신까지 조작하려 한다'는 의혹보도와 함께 사육신논쟁이 일어났다. 언론에 등장한 권력자 김모씨는 1979년 독재자 박정희를 저격한 '10.26 사건'의 주역이었던 김재규였다. 김재규는 김녕김씨 종친회 회장도 지낸 인물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결국 1982년에 이르러 "종래 사육신을 변경한 적이 없다"고 한 발 뺀다. 그런데 누가 봐도 비겁한 모습이었다. 이미 관련 당사자가 사망한 이후임에도 권력에 굴종했던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보다 책임 회피용 변명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그런 비겁한 행태는 지금까지도 사육신논쟁을 멈추지 않게 하는 뿌리이고, 사육신 문중 사이의 갈등을 계속 조장하는 원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