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 공장 생활 20년에 얻은 것은 직업병이었다.
정세훈
시인의 아버지는 광부였다.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가 광부로 노역하다 귀국해서 여전히 광부로 일했다. 어머니는 일 년에 열 달을 누워 계셨다. 술 취한 남편의 폭력과 끔찍한 가난에다 전쟁 와중에 두 아들을 잃은 슬픔이 어머니를 병들게 했다. 시인의 어머니는 화병을 앓았다.
학창 시절, 그의 꿈은 소월처럼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공부도 무척 잘했다. 문교부장관상(현, 교육부장관상)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가난 때문에 고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1972년 여름, 열여섯 소년은 좌절의 눈물을 훔치면서 홍성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상경했다.
어머니의 약값을 대드리고 가난한 아버지를 도와드리고 싶어 상경한 소년은 식당과 술집 종업원 생활을 하며 객지를 떠돌았다. 하지만 어머니 약값은 벌지 못하고 타관객지 서러움만 겪었다. 이듬해, 서울을 떠나 부산의 남성복 전문매장에서 일하던 열일곱 소년은 취객과 매장 종업원 간의 싸움에 휘말리면서 두 달 보름을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불쌍한 부모님의 노고를 덜어드린답시고 돈 벌러 나온 놈이 되레 커다란 짐만 되어 드리다니….'
출소한 그는 서러운 고향을 다시 떠나 서울 중랑천 소재 영세 공장에 취직했다. 12시간 주야로 교대 근무하면서 가느다란 동선을 열처리 해 특수 도료로 피복을 입혀 전자석선을 만드는 중노동이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열기와 신나 등 화공약품이 진동하는 열악한 작업 환경만 괴로운 게 아니었다. 선배 노동자들은 망치와 스패너 등 공구를 집어던지기 일쑤였다. 병든 어머니에게 약값을 보내야 했기에 참고 견뎠다.
시인이 공장 생활 20년에 얻은 것은 직업병이었다. 온 몸에 진물이 생기고 피부가 벗겨지는 등 나환자 증세가 나타났지만 당시 영세 공장 노동자에게 산재는 어림없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고 모아둔 몇 푼의 돈은 치료비로 날아갔다. 병이 진폐증으로 판명 났지만 보상은커녕 치료비조차 가난한 노동자의 몫이었다. 노동자의 비참한 삶 위로 죽음의 기운이 덮쳤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저 하늘의 해와 달과 별 무리로 뿌려지지 말고
뿌려지어 뿌려지어
외롭지 않은
이 산천에 뿌려지거라
(정세훈 시인의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중 일부)
시인은 죽음 문턱까지 갔다. 아프고 아팠던 인생을 두고 떠날 채비를 하면서 유고시를 썼다. 시인의 간구가 하늘에 닿았을까. 신은 시인의 생명을 거두어 가지 않았다. 2006년, 가망 없다고 했지만 어려운 수술 끝에 소생했다. 오랜 투병 생활을 이겨낸 시인은 2012년부터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 고공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아프지 말라, 제발 아프지 말라고 노래하고 있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픈 사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