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신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집권당을 오래 지낸 보수 정당에 대한 전면 수술을 맡은 김병준·전원책 두 인물한테 '로망'이 될 만한 사례들이 있다. 거의 비슷한 조건에서 인적 쇄신을 성공시킨 개혁가들이 있었다.
고려왕조 지배층이 권문세족에서 신진사대부로 바뀌던 시절이었다. 대규모 부동산과 명문 가문을 기반으로 출세한 집단에서, 중소 규모 부동산과 학문 실력으로 출세한 집단으로 권력의 헤게모니가 이동하던 때였다. 풍운의 개혁가, 신돈(?~1371년)이 등장하던 시대였다.
사찰 노비로 태어나 문맹으로 살았던 신돈은 1365년 공민왕에 의해 전격 발탁되기 전만 해도, 정치권과의 인연이 전혀 없는 무명 승려였다. 그런데도 전권을 부여받은 지 불과 1개월 만에 구세력인 권문세족을 대거 숙청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생긴 공석들을 채운 세력의 상당수는 전원책의 말마따나 "바깥에서 비바람 맞으며 자란 들꽃 같은 분들"이었다. 개혁 지향적인 사대부들('학자+관료' 성향)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로써 권문세족이 완전 퇴출된 것은 아니지만, 신진사대부가 새로운 지배층이 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는 성공했다.
덕분에 공민왕은 몽골과 연계된 권문세족을 약화시키고,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함께 왕권 강화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목적이 어느 정도 성취되자, 공민왕은 신돈을 '팽'했다.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왕씨의 나라가 아니라 신씨의 나라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돈의 명성이 명나라에까지 알려졌을 뿐 아니라 신돈이 독자적으로 충주 천도까지 추진했기에, 공민왕은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신돈은 개혁에는 성공했지만 보신에는 실패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약점에도 강펀치 날린 조광조
조선왕조에서 기득권층인 훈구파에 대한 사림파의 도전이 강해지던 시절이었다. 훈구파는 대토지를 보유했다는 점에서는 권문세족과 유사하지만, 명문 가문이 아닌 정변·쿠데타 승리를 기반으로 출세했다는 점에서 권문세족과 달랐다. 사림파는 신진사대부와 거의 유사했다.
신돈이 등장한 시기는 구세력이 신세력으로 바뀌는 과도기였던 데 비해, 이 시기는 신세력의 도전이 점차 강해질 뿐 두 세력이 교체되는 시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신돈 시기에 비해 구세력 퇴출이 상대적으로 힘들었다. 이런 힘든 일을 해낸 인물이 조선 중종 때 조광조(1482~1519년)다. 조광조는 신돈만큼 광범위한 숙청을 단행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강펀치를 날려 훈구파를 휘청거리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개혁에 필요한 권한을 받을 당시, 조광조는 과거시험에 갓 급제한 신진 관료였다. 거기다가 정치적 약점도 있었다. 과거수험생 시절에 혁명음모에 가담했다가 방면된 일이 있었다. 이때 그는 혐의는 분명했지만 명문가 자제라는 이유로 석방됐다. 이 때문에 '운동권 출신'이란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다.
조건은 불리했지만, 그는 미션을 수행해냈다. 중종으로부터 받은 권한을 십분 활용해 훈구파를 과감하게 공격하고 그들을 약화시켰다. 덕분에 그가 죽기 전에 일시적이나마 약 3, 4년간 사림파 정권이 출현할 수 있었다.
최대 수혜자는 중종이었다. 훈구파가 약해진 토대 위에서 이전보다 강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시 목적이 성취되자 조광조를 '팽'했다. 신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를 좀 더 방치되면 '이씨의 나라'가 아니라 '조씨의 나라'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씨가 왕이 될 거라는 주초위왕(走肖爲王)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주초(走肖)는 조(趙)를 뜻했다. 조광조 또한 개혁에는 성공했지만 보신에는 실패한 인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