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 부녀보호소 집단탈출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경향신문(1967. 2. 9)노량진경찰서는 여성 인권침해의 상징적인 장소 대방동 <서울시립 부녀보호소>에서 탈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출동하여 서울시의 인권침해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경향신문사
노량진경찰서의 흑역사는 관할구역에 있던 중앙대와 숭실대, 총신대 학생들을 상대로 더 자주 일어났다.
1971년 10월 16일 새벽 이인근 등 중앙대 학생 4명을 시위주동 혐의로 연행해 5일 만에 석방했다는 기사를 시작으로 언론에 등장하는 것만 따져도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은 1973년 숭전대(숭실대의 당시 이름) 학생 600여 명의 반유신투쟁을 진압하면서 최경열 등 3명을 연행한 일, 1974년 반유신투쟁에 나선 김철웅 등 중앙대 학생 3명을 연행하여 구류에 처한 일, 1975년 중앙대생 2명과 숭전대생 2명을 연행한 일 등 계속 됐다. 매년 반유신투쟁에 나선 대학생들에 대한 탄압을 지속적으로 행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노량진경찰서의 흑역사는 1980년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백의 시민들을 학살하고 들어선 전두환 군사정권 때에 그 도를 더한다. 1980년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는 중앙대, 숭전대, 총신대 학생들의 헌신적 활동은 1980년 9월 개강과 함께 채플시간에 계엄해제와 독재타도를 주장하는 유인물을 배포한 숭실대 학생들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노량진경찰서는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고 하는 대학생들의 활동을 차단하기 위해 시위주동 학생들을 잇달아 연행하고 구속하는 것으로 맞선다.
1981년 3월 23일 중앙대 도서관 3층 열람실에서 유인물 배포하며 교내시위를 주도한 박문수, 김증래, 오춘성 등 3명의 학생을 구속하는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5월 7일 마찬가지로 도서관 3층 열람실에서 시위를 주도한 중앙대생 박영권과 이상 등 2명을 구속한 일, 1982년 9월 도서관 4층에서 '학우에게 보내는 글'을 배포하면서 밧줄 시위를 주도한 중앙대생 이근원과 임재선 등 2명을 구속한 일, 같은 해 11월 교내시위를 주도한 중앙대생 김연명을 구속한 일도 다 노량진경찰서가 한 일이다.
1983년부터는 시위가 더 자주 발생함에 따라 구속자도 급증했다. 숭전대에서는 교내시위를 주도한 김상림과 최성남 등 2명(3월), 소유진, 윤석호, 윤성환 등 3명(6월), 배정섭, 배영환 등 2명(11월), 함지호, 이기원, 박재국 등 3명(11월)이 잇달아 구속된다. 중앙대생들도 교내시위를 주도한 윤민탁, 박수일 등 2명(5월)과 이도형, 김민수 등 2명(6월), 기형노, 배정미 등 2명(10월)이 잇달아 구속됐다.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민정당 동작지구당사 앞에서 '독재타도' '민정당 독재 결사반대' '전두환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횃불시위를 벌이다 연행된 14명도 노량진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구속(3명) 또는 구류 처분을 받았다. 같은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숭전대 조혜란 학생도 노량진 육교 위에서 다시 시위를 벌이다 노량진경찰서에 연행돼 구속됐다.
노량진경찰서의 흑역사는 신대방동에 있던 1970년대 민주노조의 상징 원풍모방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데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 원풍모방 노동자들은 한국모방 시절이던 1972년부터 '노동조합 정상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9월 노량진경찰서가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역할을 맡아 방용석과 정상범 등 노조 간부 2명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