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21일 금요일 평택공장 본관 5층 대회의실에서 쌍용자동차 사측과 노조가 119명 전원 복직 합의 조인식을 열고 해고자 복직에 관한 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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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는 그의 죽음이 생활고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꿈쩍 하지 않는 이 사회의 외면과 무관심이 김씨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란 의견이 많다. 그의 부인 신상진씨는 해고자 전원 복직이 합의된 뒤 후인 지난달 22일 <단비뉴스>와 통화에서 "다들 잘 되셔서 좋다"면서도 "당장 제 옆에 있던 분은 안 계시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회사가 좀 더 빨리 결정을 내렸으면, 이런 선택까지는 하지 않았겠죠"라고 덧붙였다.
쌍용자동차 노사는 지난 2015년 12월 단계적인 해고자 복직에 합의했지만 3년간 복직된 사람은 45명에 불과했다. 신씨는 "회사가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이라며 "그분은 계속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복직이 안 되니까 좌절하고 또 좌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벼랑 끝에 내몰렸던 해고자들
한국 사회가 쌍용차 해고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숨통을 터주었더라면 마지막 복직자 숫자가 119명이 아니라 세상을 떠난 26명을 합쳐 145명이 됐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쌍용차 대량 해고 3년 뒤인 2012년 3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아무개씨는 쌍용차 해고 경력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녀 재취업이 막히자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알려졌다. 그는 해고 뒤 쌍용차 공장이 있는 평택에서 1년간 구직 활동을 했으나 그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쌍용차 공장이 있는 곳이라 그런 모양이라며 김포와 인천 등으로 옮겨서 어렵게 일자리를 구했는데, 회사가 쌍용차 출신임을 알아내고는 쫓아내 버렸다는 게 노조 측 설명이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은 "(이아무개씨가) 술만 마시면 주변에서 빨갱이라고 한다며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 한 달 전쯤 '평택에 있는 중소기업 면접을 봤다'고 좋아했는데, 쌍용차 출신임이 드러나 결국 재취업을 못 했다"며 "그게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김 지부장은 "2009년 대량 해고 이후 재취업에 성공한 노조원은 한 사람도 없다"고 주장하며 "회사들이 어디서 어떻게 알아내는지 쌍용차 출신은 바로 찾아내 배제했다"고 말했다.
트라우마와 생활고... 무너진 가족
이들에 대한 배제와 무관심은 그들의 가정까지 파괴했다. 대량 해고 직후인 2010년 4월 25일에는 쌍용차 노조원 임아무개씨의 부인 서아무개씨가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임씨는 무급휴직 상태였는데, 다른 일자리 찾기도 쉽지 않고 일용직 일자리를 찾아봤지만 생활비를 충당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차를 팔고 아이들 돌반지와 결혼예물까지 팔았지만 복직이나 재취업 희망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결국 부인은 세상을 등졌다.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채 안돼 남편 임씨도 심근경색으로 부인 뒤를 따랐다. 동료와 친지들에 따르면 임씨는 숨지기 하루 전 "애들 등록금만 생각하면 가슴이 숮덩이가 된다"며 친구를 붙잡고 하소연했다. 임씨는 무급휴직 기간이 끝나 2010년 8월에 복직해야 하는데 회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렸다.
당시 임씨의 통장 잔고는 4만 원이었고 카드빚이 150만 원 이상이었다.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는 두 자녀가 남은 집안에는 쌀 한 줌과 라면 한 봉지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