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군학마을과 들녘. 누렇게 물든 황금들녘이 바닷가 마을의 풍경까지 넉넉하게 해준다.
이돈삼
이순신은 군사들과 함께 내륙에서의 마지막 행선지가 될 군영구미로 향했다. 군영구미는 지금의 회천면 전일2리 군학마을이다. 1457년(세종 3년) 수군만호진이 설치되면서 군영구미(軍營仇未), 임진왜란 땐 구미영성(龜尾營城)으로 불렸다. 이후 군사들의 하얀 깃발이 늘 휘날렸다고 '군학'이 됐다. 휘리재, 성머리, 성안, 성안우물, 진밖끝, 활터 등 군사용어가 지금도 지명으로 쓰이고 있다.
이순신이 해안길을 따라 도착한 군영구미는 적막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의 배도 보이지 않았다. 이순신이 수군들과 함께 타고 바다로 나가려던 배였다. 수소문을 해 알아봤더니, 배설이 회령포로 가버린 것이었다. 당초 구상에 차질을 빚게 된 이순신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배설을 잡아다가 호되게 곤장을 치고 싶었다.
배설이 약속을 어겼다고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조정의 수군철폐령에 맞서며 이끌고 온 수군인데, 여기서 시간을 끌어선 안됐다. 이순신은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지역주민들의 배를 동원하는 방안을 떠올렸다. 이 마을 출신의 김명립과 해상의병 마하수에게 고깃배를 구해올 수 있는지 물었다. 이순신의 부탁을 받은 김명립과 마하수가 어선이 모여 있는 포구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