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펜서 라따르스키 가족스펜서의 부모는 항상 그가 스스로 무언가를 추구할 수 있도록 지켜봐주었고, 진로를 정하거나 무언가를 해나갈 때 어떤 압박도 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관심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뭔가 잘못하고 있거나 개선해야 할 점이 있으면 꼭 말해주었고, 필요할 때는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정현주
스펜서는 오리건주에 있는 유진 국제고등학교에 다녔다. 고교 시절 그는 한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 깊이 몰입하는 학생이었다. 학점이나 대학 진학,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동료들의 압력(?) 때문에라도 그는 똑똑한 학생이 되어야 했다.
그에게는 똘똘 뭉쳐서 늘 모든 일을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다른 대부분의 학생들과도 폭넓게 사귀었다. 또 얼티미트 프리스비(Ultimate frisbee, 미식축구와 비슷한 원반 게임) 팀에서 선수로 뛰었는데, 그러다보니 금방 많은 친구들과 친해졌다. 다른 지역 고등학교와도 경기를 했는데, 그러는 동안 상대팀 선수들 중 몇 명과도 매우 친해져서 지금까지 가깝게 지내며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오리건주립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2학년 겨울까지 매우 힘든 기간을 보냈다. 그는 자신에게 맞는 전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경영학, 심리학, 물리학, 인체생리학 등 폭넓은 분야를 전공해 보려 시도했지만, 어느 것도 전공할 만큼 흥미를 끌지 못했다.
자라면서 항상 수학, 과학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쪽으로 정하려다보니 결정하기가 더 어려웠다. 오랜 방황 끝에 그는 결국 국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공부해왔던 분야를 전공으로 이어가기로 했다. 그는 국제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은행에 취업했다.
우수한 학업 성적을 유지하면서도 학교 내 스포츠팀 선수로 뛰고, 다른 지역 학교들과 경기를 치르는 가운데 타학교 학생들과도 평생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고교 생활. 2년 간 전공을 찾기 위해 여러 분야를 탐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대학 시절. 그리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행 취업. 원 없이 자신의 뜻을 펼쳐본 그의 삶은 많은 한국 청년들이 선망할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현재 직업에 만족하는지 물었다.
"네. 저는 은행원으로서 제 직업에 만족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은 아닙니다."
스물여섯. 예상과 달리 그의 선택지는 '안정된 직장'이 아니었다. 인류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비영리 단체나 국제 NGO에서 일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고, 또 다른 비영리 단체들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목표를 가지게 된 것에는 그가 입양인이라는 사실이 한몫했다. 그는 입양을 통해 자기 삶의 모든 것이 변화되었다고 말했다. 주로 백인들만 사는 곳에서 자랐는데도 스펜서의 아시아 혈통이나 입양 사실이 문제된 적은 없었다. 그런 그가 입양인 캠프에 처음으로 참가했을 때, 입양으로 인해 괴롭힘 당한 사연을 듣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를 남을 돕는 삶으로 이끌었다. 첫 입양캠프에서 부정적인 사례를 들었음에도 그가 입양, 혹은 해외 입양에 찬성하는지 궁금했다.
"네. 찬성합니다. 세계 여러 곳의 아이들이 처한 상황으로 볼 때 해외 입양은 필요합니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 꼭 필요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못 갖춘 아이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아이들이 성공적인 삶을 살 기회를 우리가 막아야 할 이유가 뭐죠? 모든 아이들에게는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합니다."
"저를 입양한 부모님이 제 부모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