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서 커터칼을 찾던 손님
미디어눈 김하늘 에디터
중국에서 북한에 대한 생각 변해
혼자 탈북해서 이런 크고 작은 난관을 겪으며 적응하고 살아가는 나를 보면 대견하다. 2015년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북한에서 대학생이었다. 북한엔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비롯해 3개의 종합대학과 각 도에서 운영하는 공업대학, 사범대학, 의약대학 등의 지방대학들이 있는데 대학에 가려면 한국처럼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한다.
북한 대학은 인문계 대학보다 야간 대학과 이공계 단과대가 더 많다. 계열별로 다르지만 보통 3~7년제로 운영되고 사범대는 4~6년제가 많다. 나는 고향에 있는 사범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탈북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졸업해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요즘 젊은 세대를 '밀레니얼 세대'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나처럼 1990년 이후 출생한 2030 청년들을 '장마당 세대'라고 부른다. 내 윗세대들은 사회주의 배급 체제의 혜택을 누리며 장마당에 나가는 걸 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은 우리 세대는 장마당(시장)에 나가 돈을 벌어 먹고사는 문화에 익숙했다. 밥벌이를 위해선 장사가 필수였고, 시장에 가면 과일이나 화장품뿐만 아니라 한국 드라마나 전자 기기 등을 구할 수도 있었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한국 화장품과 드라마가 유행이었다. 암암리에 남조선 말투와 패션을 따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물론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이루어져야 했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한국사회를 동경한 것만은 아니다. 평생 북한 사회의 우수성에 대해 가르치는 세뇌 교육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집에서도 부모님들이 북한의 좋은 점만 가르치기 때문에 이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북한)가 제일 좋다는 생각은 흔들리지 않는다.
몰래 들여온 드라마를 보며 남한의 경제 상황이 북한보다 더 낫다는 걸 느끼지만, 우리도 금방 남한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사회에 가득했다. 학교 선생님, 동네 주민, 부모님, 모두가 함께 믿는 그 진리를 의심할 리 없었고, 김씨 정권은 우리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북한을 떠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학교를 계속 다니기 위해 중국으로 가서 학비를 벌어서 돌아올 계획이었다. 북한에서는 대학교에 다니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하다. 수업 외에도 학교 건물 보수, 실내 장식 등 온갖 비용을 학생들로부터 충당하다 보니 웬만해서는 대학교에 다니기 힘들다. 부모님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이다.
나는 어머니가 5살 때 돌아가시고 새어머니와 재혼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대학에 다니던 시기에 새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아지고 학비 문제로 갈등이 생겼다. 2학년까지 마치고 결국 내가 직접 학비를 마련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친한 친구와 중국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는 정말 한국행은 생각지도 않았다. 단순히 중국에서 학비를 벌어서 돌아올 생각이어서 겁이 없었던 것 같다. 처음 탈북 시도 때는 친구와 압록강을 건너는데 군인에게 잡히고 말았다. 군인은 어려서 한 번만 봐주겠다며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혼을 내고는 돌려보냈다. 그리고 용기 내 도전한 두 번째 시도에 친구와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북한에 대한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백화점 앞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정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보고 너무 깜짝 놀랐다. 북한은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서 큰 건물을 짓지만, 실제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백화점도 물건을 팔지 않는 곳이 많고, 정문을 막아놓고 후문으로 사람들이 다닌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 아닌 사건이지만 처음으로 외부의 시선으로 북한을 바라보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사람들이 쇼핑하는 신기한 광경을 넋을 잃고 보면서 그제야 내가 알던 북한의 진실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