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둔 17일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한옥마을 하동 정씨 고가에서 연꽃어린이집 원생들이 할머니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송편만들기 체험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기저기서 선물세트 광고 문자가 날아와 귀찮게 하더니 어느새 추석이다. 시골 마을에서 살던 어린 시절, 추석은 동네 아이들과 밖에서 밤늦게까지 놀 수 있는 일 년 중 몇 안 되는 날이었다. 동산에 뜬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빈다는 명목이었다.
도시로 이사를 온 후엔 친척들 집을 오가며 또래 사촌들 만나는 재미가 있었다. 친척 어른들을 용돈을 주는 좋은 분과 안 주는 인색한 사람으로 구분해 맘속으로 호불호를 따지기도 했다. 어른들끼리 다투는 통에 사촌들과 사이가 어색해진 어느 명절도 떠오른다. 어쨌든 어딜 가도 먹을 게 많고 학교에 안가도 되니, 명절은 없는 것보단 나았다.
어른이 되면서 명절은 애증의 대상이 됐다. 결혼을 한 후엔 더욱 그렇다. 선물을 고민하게 되고 편치 않은 관계의 친척이 떠올라 미리부터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래도 여성들이 주도하게 되는 차례상, 명절 밥상, 그에 따르는 노동의 고단함에 비할 순 없다. 상상만으로 숨이 막힌다.
그냥 혼자서 맘껏 쉬고 싶은 마음과 친지들과 웃으며 명절을 보내는 판타지를 둘 다 놓고 싶지 않다. 명절 딜레마다. 이맘때가 되면 여기저기에서 '명절우울증' '명절 스트레스'란 말이 단골로 등장하니 나만 겪는 일은 아닌 듯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1950년 전쟁둥이인 엄마의 추석은 어땠는지 궁금했다. 엄마는 동네에 몇 가구 살지 않는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추석 전부터 떡 만들 준비를 했어. 과정이 좀 복잡해. 누릇해진 벼를 훑어서 솥에 쪄서 말려. 다 마르면 절구에 찧어서 왕겨를 벗겨. 그다음에 물을 촉촉하게 뿌려서 다시 또 살살 찧으면 누런 껍질이 벗겨져. 백미가 되면 다시 빻아서 가루로 만드는데 이것도 말처럼 쉽지 않아.
일단 빻아서 고운체로 가루를 내려. 그러면 위에 덜 빻아진 건더기가 남잖아. 그걸 또 빻고 체에 내리고, 빻아서 내리고,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는 거야. 그렇게 쌀가루를 만들어 반죽을 해서 송편을 빚는 거지. 쌀가루 내는 건 단순한 일이라 대부분 애들이 했어. 오빠들도 하고 나도 하고 그랬지. 허리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근데 몇 번 집어먹으면 금방 없어져. 식구가 많은데 쌀은 귀하고 떡을 한없이 많이 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도 하기 싫다는 생각은 못 했어. 당연히 해야 되나보다 했지. 추석이면 밤도 따 먹고 감도 따서 소금물에 담갔다가 떫은맛 빠지면 먹고, 제사 지내는 사람들은 찹쌀전을 부치기도 했어. 오빠들이 과자도 사줬어. 큰집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했는데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어. 기차 지붕 위에 올라가 앉아서 가기도 하고 기차 옆이나 뒷문에 매달려 가는 사람도 있었지. 가다가 떨어지면 죽을 텐데도 그땐 뭐 단속을 하지도 않았고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 아주 힘들었어."
명절 기분 안 나던 시절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서민들의 명절은 평소 삶처럼 곤궁했다. 1956년 9월 20일 <동아일보>에 쓸쓸한 추석 풍경을 담은 글이 실렸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송편이라도 빚어서 제대로 추석을 쇨 수 있었던 사람들이 서민층에는 과연 얼마나 될는지? 비가 와서 그런지 어린이들 때때옷도 아가씨들의 분홍치마도 좀처럼 구경할 수 없고 거리는 철시된 채 그대로 한산"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 추석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이번 서울의 추석 명절은 유난스리도 쓸쓸했다. 사월혁명정신을 살리기 위해서 자숙을 한 탓인가. (중략) 가난에 우는 사람들은 아주 말이 아니었다. 조상에의 차례 올리는 것은 둘째치고 토란국 한 그릇에 송편 한 개 못 먹은 집도 수두룩하다.
더구나 어린 아들 딸들이 옹기종기 여럿 들끓는 집안에선 고무신 한 켤레도 못 사줬을 게니, 그 어버이의 구슬픈 마음들이 여북했으랴. 추석날 아침 어느 실직한 막벌이 사나이는 자기 집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죽었다. 그는 삼남 삼녀의 아버지다." (1960년 10월 7일 <동아일보>)
이런 분위기는 1960년대 중반까지 쭉 이어졌다. "명절 기분이 안 난다"거나 "날이 갈수록 세상인심은 거칠어간다"거나 "때때옷 입은 아이들이 줄었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1962년부터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이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1970년대에는 전국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직장을 얻은 도시민들의 삶은 조금씩 나아졌다. 신문에 추석상차림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리고 낭비 없는 명절을 보내자는 주장이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새 옷 한 벌 마련해서 1년을 입어야 했던 옛날엔 추석빔이 큰 비중을 차지했었으나 요즘처럼 바겐세일이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장만할 수 있어 의미가 별로 없다.(중략) 우리 전통에 추석에 특별한 선물을 하는 풍속은 없다. 요즘은 직장의 아랫사람이 상사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기회로 변모되어 묘한 풍조를 낳고 있다.
더구나 그 선물이라는 것이 고액의 상품전으로 변해 부정부패의 씨를 안고 거래되고 있는데 이는 불식해야 할 풍조이므로 상류층에서 솔선수범해야겠다. 꼭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경우라면 달걀 2, 3꾸러미나 쇠고기보다 값싼 닭 2마리 정도면..." (1971년 9월 30일 <매일경제>)
송편에 밀가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