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노동의 소음이 싫어 귀를 닫은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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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귀가 잘 안 들리기 시작했다. 세 번 째 보청기였다. 사드리면 잃어버리고, 또 사드리면 잃어버리고.
"아... 어디 갔나 모르겄다."
안 그래도 말수 적은 아빠는 그렇게 점점 더 조용히 살고 계셨다. 아빠는 평생을 건설현장에서 일을 해왔다. '업무'라는 단어보다는 '노동'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자리. 망치 소리와 철근 소리, 굴착기 소리가 가득한 곳.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소리치는 소리가 가득한 곳.
그곳에서 아빠는 평생을 소음 속에 살아왔다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보청기를 끼고 일을 할 때면 오히려 공사현장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고 했다. 보청기를 빼는 일이 잦았고,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소음을 더 크게 들리게 하는 보청기는 아빠의 귀가 되지 못했다.
당연한 것일까? 아빠의 귀가 멀어간다는 것이.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자면 단순 노동이 반복되는 그 곳에서, 길게 회의를 나눠야 할 일도 누군가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도 없는 그곳에서, 아빠의 귀는 쓸모를 잃어 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노동의 소음이 싫어 귀를 닫은 건지도 모르겠다. 평생 몸으로 일했기에 그 몸은 이제 하나 둘 한계를 드러내고, 기능을 멈추는 게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슬프고 애잔하면서도, 전화기 너머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딴소리만 계속하는 아빠의 말을 듣고 있자니 짜증이 올라와 소리를 친다.
"아빠!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봐!"
통화하다 짜증을 낸 정도만큼 전화를 끊고 나면 눈물이 난다. 누군가의 말귀를 잘 알아들어도 자기 고집을 피웠던 과거의 아빠와, 이제 누군가의 말귀를 잘 못 알아듣고 순해진 지금의 아빠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일까?
나는 지금도 아빠가 자신의 말로 고집을 피웠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소음도 내 말도 그냥 다 잘 들렸으면 좋겠다 생각이 든다. 아빠는 이제 나와 마주하고 내가 무언가를 얘기할 때면 대답보다 그저 웃고 있을 때가 많아졌다.
내 말을 반밖에 듣지 못하는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