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자료로 쓸 책 목록들을 문자메시지로 보내면, 그녀는 다음 날 아침 도서관 내 전용 자리에 그 책들을 올려두었다. 나는 그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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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사서로 오랫동안 일했던 친구 A는 내 글의 열렬한 독자이자 비서였고 내가 의기소침할 때마다 응원해주는 치어리더였다.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됐으나 가까워진 건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지난해 1월부터다.
매일 자료로 쓸 책 목록들을 문자메시지로 보내면, 그녀는 다음 날 아침 도서관 내 전용 자리에 그 책들을 올려두었다. 나는 그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녀는 시간마다 슬쩍 와서 더 필요한 게 없는지 묻고 때때로 커피를 배달해주었다.
점심시간이면 우리는 주로 도서관 근처에서 순댓국을 먹었다. 그녀는 국밥을 떠먹으며 내가 오늘은 무엇에 대해 쓰는지 스파이가 염탐하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는 아주 디테일한 것까지 다 꺼내놓았다. 귀를 쫑긋하고 내 얘기를 들으며 큰 깍두기를 한입에 넣고 우적우적 밥을 먹는 모습이 재밌다. 안 그래도 먹는 속도가 느린 나는 말하느라 반의반도 못 먹었는데 그녀는 뚝배기를 들어 마지막 국물을 넘긴다. 결국 혼자 깍두기까지 클리어.
가끔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써 오곤 했다. 일기검사를 받는 사춘기 소녀처럼 말간 얼굴로 내 반응을 기다린다. 나는 그녀의 글이 좋았다. 조미료 대신 멸칫국물에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춘 국수 같았다. 기교 없고 담백하고 순수했다. 뭔가 첨언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우와 좋네." 내가 말하면 그녀는 실망 반, 안도 반의 희미한 미소를 보내며 가슴속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택배가 왔다. 열어보니 껍질을 깐 고구마순 한 봉지와 단호박, 고구마, 말린 고사리가 들어있다. 몇 달 전, 갑작스레 귀농해버린 그 친구가 보내온 거다. 택배 박스 안에는 농산물 종합세트와 함께 그녀의 사연이 들어 있었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랬다. 지난해 12월, 그녀는 정읍에 자리를 잡았다. 알 수 없는 인생이라더니. 골짜기와 낭떠러지를 돌고 돌아 그녀 나이 47세. 사랑하던 그를 다시 만났다.
그녀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7살 때다. 그는 그녀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첫 발령이 난 선생님이었다. 가난 때문에 대학은 꿈도 못 꾸던 그녀에게, 넓은 세상을 들려주며 그녀가 갈 수 있는 학교를 알아봐 주고 아무런 조건 없이 첫 등록금도 지원해 주었다. 어리바리한 그녀는 감사의 마음도 표현하지 못했다. 대신 그가 오래도록 그녀 곁에 머물 거라는 헛된 오해를 혼자서 했다. 그를 보면 뛰는 가슴이 사랑인지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다.
그렇게 지방 전문대를 입학한 그녀는 이후 그가 결혼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얘기를 전해 들었다. 심장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는 어떤 책임질 만한 행동도, 언약도 한 적이 없었으므로 어린 그녀는 소리 없이 눈물만 삼켰다. 그렇게 그와 혼자 마음으로 이별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도 했다.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십여 년 전 그녀는 이혼했다. 구구절절한 인생은 그녀를 바닥까지 밀어댔고, 그녀는 그녀를 포기하려 했다. 제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든 날들이 지나갔다. 눈물도 말라붙었고 살아야 하는 이유도 뭣도 없이 시간을 죽였다. 그즈음 그녀는 그의 소식을 들었다. 귀농해서 잘 지내신다는 동창들의 얘기에 연락처를 손에 쥐었지만, 초라해진 그녀는 감히 연락하지 못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어느 날, 죽기 전에 그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안부로 시작한 대화는 속을 숨길 겨를도 없이 새어 나와 마침내 십 년 묵은 체증을 토해내듯 가슴속의 울화를 토해냈다. 그녀는 시장통에서 엄마를 잃어버렸다가 찾은 아이처럼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울음을 헐떡이며 고해바쳤다. 밑도 끝도 없는 그녀의 흐느낌을 그는 듣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