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다팔아도 물건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위성은
만 원을 넘지 않는 구제옷과 집에서 가져온 헌 그릇과 냄비, 중고매장에서 산 미니 냉장고와 삼촌에게 받은 안 쓰는 컴퓨터. 서울살이 두 해째, 독립생활을 시작할 때 가지고 있던 물품의 전부다.
그때 염리동 옥탑이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10만 원. (쓸 돈이 없어서라도) 검소함의 화신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되짚어 보면 그 시작에는 '홈쇼핑'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방 한 칸이 아쉬웠던 고달픈 서울살이
나는 원하던 대학에 갔지만 '인서울'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성적은 충분했지만 딸을 밖으로 내돌리면 안된다는 가부장의 확고한 의지와 비싼 사립대학 등록금, 생활비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기독교대학은 내게 너무나 갇힌 세계였다. 더 넓은 세상을 배우기 위해 휴학과 서울행을 감행했고 여러 헛발질을 거쳐 졸업 후 다시 서울에 자리를 잡게 됐다.
서울살이는 고달팠지만 생판 남에게 얹혀살던 더부살이에 비하면 혼자 소꿉놀이하는 양 새롭고 즐거웠다. 신촌의 마트에서 장을 봐다가 끼니를 해결했고, 생선을 팔던 주인집 내외가 남은 조기를 주면 매운탕을 끓여 5첩 반상을 해먹곤 했다. 당시 대안교육 단체에서 받던 월급이 120만 원이었지만 먹고 살 순 있었다.
이후 첫 직장에서는 2백만 원이 안 되는 월급을 받았고 그 돈으로 춤도 추면서 나름 알차게 살았다. 그런데 신입치고 썩 괜찮은 성취를 거두던 2년차에 거래처 회식자리에서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다.
사과를 받으러 간 내게 가해자는 머리를 툭툭 치면서 모멸감을 주었다. 나는 후임자까지 구해다 놓고 회사를 관둔 후 인권위에 이를 제소했고, 몇 달간 지난한 싸움을 거쳐 사과와 약간의 배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자의반 타의반 프리랜서 생활이 시작됐다. 첫 회사와 단절하면서 인맥이 거의 끊겼으므로 일을 구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기왕 회사를 관뒀으니, 하고 싶었던 일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독립영화 일과 아마추어 극단 활동도 병행했다.
마감 몇 개를 해내면 약간의 고료를 받아 간신히 생활을 이어갈 순 있었다. 혼자 있을 때 활기찬 사람의 말소리가 그리워 종종 홈쇼핑을 틀어놓곤 했는데 어느 날 손을 좀 떨면서 내복세트를 덜컥 질렀고, 정상가족에게 필요한 만큼의 생필품도 한 번씩 샀다. 그게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내 방식이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