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열매' 속 그림
사계절
빨리 독립하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무렵부터 대학만 가면 집에서 나와야지 생각했다. 집은 고단한 마음을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아빠도, 엄마도, 오빠도 함께 있는 그 불편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대학엔 갔지만 집을 나올 수 없었다. 돈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장 빨리 졸업이란 걸 하고 싶었다.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그러려면 가능한 한 빨리 취업이란 걸 해야 했다. 대기업, 공무원, 높은 연봉? 처음부터 그런 목표 따윈 없었다. 그저 취재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곳이면 족했다. 기대치가 낮아서였을까. 생각보다 빨리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래도 독립할 수 없었다. 대학에 다니면서 은행에서 빌려 쓴 학자금을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턱없이 적은 월급으로는 저축은커녕 카드 돌려막기에 바빴다. 근근이 버텼다. 사방이 막힌 길을 걷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독립도 하지 못하고 그 집에 계속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 그랬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그 막막함에 힘들었고 순간순간 우울했다.
그때였다. 아빠가 교통사고가 난 건. 염치가 좀 없었지만 합의금으로 받은 돈 가운데 일부를 달라고 했다. 아빠는 노발대발했다. 그 돈을 빼내서 나에게 준 건 엄마였다. 빚부터 갚으라고 했다. 빚으로부터 탈출한 나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했다. 내 기준에서 '완벽한' 독립이었다. 오해 마시라. 도망이나 회피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같이 살고 싶었을 뿐.
그런 내가, 오매불망 집에서 독립하길 바랐던 내가, 엄마랑 다시 살게 될 줄 몰랐다. 아이 때문이었다. 아쉬운 건 나였는데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엄마랑 함께 있는 건 여전히 편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엄마가 없으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회사는 멀었고, 몸은 아팠다. 아픈 몸으로 일하러 가는 내가 엄마는 못마땅했다. "그만두라"는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왜? 이대로 경력단절되면 엄마가 취업시켜 줄 것도 아니면서." 내 맘을 몰라주는 엄마가 서운해서 아무 말이나 해댔다. 엄마는 당신 마음을 몰라주는 나 때문에 서운했을 거다.
그래도 지친 몸으로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엄마에게 "저녁으로 뭐 해줄까?"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으면 기운이 펄펄 났다. 5분 만에 때우는 찬밥이 아니라, 따습고 정갈한 밥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불맛이 나는 제육볶음, 양파가 떡보다 많은 떡볶이 같은 엄마만의 음식, 엄마만의 맛이 나는 음식을 먹을 때면 더 그랬다. 에너지가 가득 담긴 엄마 밥을 든든히 먹은 나는 틈틈이 글을 쓰고, 회사에 나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아이를 돌볼 수 있었다.
아기곰을 받아 준 큰 곰처럼...
맞다. 아기곰이 나였다. 세상을 향해 겁도 없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 오르기만 하던 내가 고꾸라질 때 나를 받아준 건 엄마였다. 붉은 열매를 먹여준 것도 엄마였다. 노란 열매를 생각하며 앞으로 계속 나아갈 힘을 준 것도 엄마였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빨간 열매>를 읽으면서 주책맞게 눈물이 났던 건 그 때문이었다. '엄마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다. 이지은 작가도 책 뒤에 썼다.
"아기곰을 받아 준 큰 곰처럼 든든한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 생각합니다. 내일의 노란 열매를 다시 꿈꾸기 위해서요."
나도 큰 곰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에게 정성스레 빨간 열매를 먹이고, 내일의 노란 열매를 꿈꾸게 할 수 있을까.
빨간 열매
이지은 지음,
사계절, 2018
할머니 엄마
이지은 글.그림,
웅진주니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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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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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아이... 고꾸라진 나를 받아준 건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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