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권익연대 전윤환 대표. 시설출신 당사자들이 모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단체다.
김지영
그는 고아로 자랐다. 이름은 전윤환, 올해 마흔 살이다. 이 이름으로 살기 시작한 지는 일곱 살 때부터였다. 그러니까 일곱 살 이전에 그는 고아가 아니었다. 한 살 위 누나가 있었고, 그때까지도 아낌없이 젖을 내어주던 엄마도 있었다. 서너 살 무렵 아빠가 무등을 태워주었던 기억은 선명한데,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그들은 이사를 많이 다녔고 매번 이사할 때마다 집은 초라해졌다. 함께 살던 누나는 사건이 있기 몇 달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착했던 누나의 별명은 마리아였다. 누나가 사라진 걸 알았지만 왜, 어디로 가야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혹은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그처럼 엄마 손에 이끌려 다른 곳으로 가야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어느 날 엄마는 그를 데리고 할머니 집을 찾았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희미한 기억이지만 시골이었고 과수원이 있었다. 그곳이 외가인지 친가인지도 알 수 없다. 시골에서 돌아오던 길 엄마는 평소 그가 조르던 야구 옷을 사주었다. 프로야구가 미치도록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때는 1985년으로 추정된다.
서울 어느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그를 의자에 앉혀 놓고 엄마는 아빠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만나고 다시 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 했다. 그는 엄마가 금방 돌아올 줄 알고 의자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줄곧 엄마가 다시 돌아올, 엄마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간은 흘렀고 어둠이 내렸다. 엄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의 먹먹하고 아득하기만 했던, 죽을 만큼 엄마가 보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다. 바로 그 자리에서 엄마 손을 놓았던 그 순간, 그의 어린 삶은 아주 작은 몇 개의 기억 만을 남겨둔 채 잊혔다. 그리고 그는 고아가 되었다.
그러므로 일곱 살 작은 소년의 입에서 기록된 그의 이름 전윤환이 사실은 정윤환 일수도, 전윤한 일수도, 아니면 정윤한일 수도 있다. 그의 일곱 살 생애가 사라진 곳 어디쯤 함께 있을 그의 진짜 이름이 말이다.
고아가 되다
터미널에 울고 있던 그를 경찰이 데려간 곳은 아동일시보호소였다. 말로만 듣던 감옥 같은 곳이었다. 수백 명으로 어림짐작 되는 그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 보호소 안에는 늘 울음이 그치지 않았고, 우울한 기운이 감싸고 있었다. 보호소 어른들은 켜켜이 쌓여 있는 빨아 놓은 옷 중에 몸에 맞는 옷을 아무거나 갈아 입혔다. 수백 명의 아이가 옷을 공동으로 돌려 입고 있었다. 유일하게 엄마의 손때가 묻은 야구 옷도 그 속에 묻혀 사라졌다. 엄마와 함께 살던 세상도 함께 사라졌다.
몇 달 뒤 그는 한 무리의 아이들과 함께 차에 태워져 충남 부여의 시골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보육시설로 이송되었다. 일곱 살 여름이었다. 그리고 야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고등학생 선배가 집합을 시켰어요. 방안에 동그랗게 모였어요. 맞은 이유는 모르겠어요. '빳따'를 맞을 때는 항상 그렇게 집합해서 맞았어요. 한 대 맞으면 '악'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세게 맞았어요. 열 대 정도 맞은 것 같아요. 어리다고 봐주지 않았어요."
보육원은 콘크리트 2층 건물이었다. 총 여섯 개의 방에 팔십여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각 방에 생활지도원 선생님이 있었다. 전부 젊은 여성이었다. 한 방에는 서너 살 어린아이부터 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까지 십여 명이 섞여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형이 그 방 대장이었다. 젊은 여자 선생님은 대장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불규칙하게 수시로 바뀌는 선생님보다 십여 년 원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대장의 힘을 더 무서워했다. 보이지 않는 폭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선생님은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