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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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전임자인 코피 아난 제7대 총장이 토요일인 18일 세상을 떠났다. 미국의 지지 속에 총장이 됐지만 미국의 '뒤통수'를 친 코피 아난이 8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아프리카 가나 출신이자 유엔 직원 출신인 코피 아난은 미국의 후원에 힘입어 1996년 사무총장에 선출됐다. 전임자인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제6대 총장도 아프리카 출신이었다. 갈리는 이집트 사람이었다. 같은 대륙 출신이 연달아 총장이 되는 게 금기시되는데도 아난이 된 것은, 갈리가 미국의 반대로 재선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UN 헌장에서는 사무총장의 임기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규정에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46년 1월 24일 개최되었던 제1차 UN 총회는 준비위원회의 권고에 부응하여 '5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5년간 재임'할 수 있도록 결의한 바가 있는데, 그것을 오늘날까지 따르고 있다."-2000년에 <한독사회과학논총>에 실린 신현기의 '국제연합 사무국과 사무총장의 기능에 대한 역사적 고찰' 중에서.
사무총장은 적어도 한 번은 재선되는 게 관행 혹은 관습법이었다. 그런데 갈리는 미국의 반대로 재선에 실패했다.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사무총장인 그가 선출되기 전에 비동맹운동(제3세계) 진영 102개국은 "차기 총장은 아프리카에서 나와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했고, 이에 힘입어 갈리가 당선됐다.
그런 갈리의 재선을 막았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제3세계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아프리카 출신을 갈리의 후임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코피 아난을 밀어준 것이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 출신이 연달아 총장이 되는 이변이 벌어지게 됐다.
미국은 코피 아난이 미국의 뜻을 따라 주리라 기대했다. 정확히 말하면, 기대했었다. 기대했었던 이유는 아난과 미국의 인연이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는 과거 식민지 역사 때문에 프랑스어의 영향력이 강하다. 그런데 아난은 영어권인 가나에서 1938년 출생했다. 그리고 공부도 주로 미국에서 했다. 23세 때인 1961년 미네소타주 매칼레스타 대학의 학부과정을 졸업했고, 다른 나라에서 잠시 유학한 뒤 미국으로 되돌아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영어권 국가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오래 공부했다는 점 때문에 미국은 코피 아난을 믿었다. 사무총장 선출 전부터 공공연한 지지를 보냈다. 그런 그가 사무총장이 된 뒤로 '중립 모드'로 바뀌리라고는 예측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난이 노골적인 반미가 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애초 기대에 비하면 상당 수준의 반미 성향을 보인 게 사실이다.
미국이 선택한 코피 아난, 기대와 달랐던 행보들 코피 아난은 돈 문제로도 미국의 신경을 건드렸다. 미국의 유엔 분담금 미납을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1998년 3월 9일자 <뉴욕 타임스>에 '유엔을 휘청거리게 하는 미납 계산서'란 글을 기고해, 미납금 13억 달러를 빨리 내라고 촉구했다. 다른 방식으로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다소 자극적인 방식으로 분담금 납부를 촉구한 것이다.
미국은 전임자인 갈리 총장에 대한 반발심 등에 기인해 분담금을 내지 않고 있었다. 프랑스 유학파인 갈리 총장이 미국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반미 성향 사무총장에 대한 반감 등에 기인해 분담금을 안 내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코피 아난은 자극적 방식으로 분담금 납부를 촉구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코피 아난을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을 만도 했다.
미국은 갈리 총장이 프랑스 유학파라는 점이 싫었다. 그래서 미국 유학파인 코피 아난을 지지했다. 그런데 코피 아난마저 미국에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정말 미국 유학파가 맞나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위에서 코피 아난의 유학 경력을 소개했다. 미국에서 학사와 석사를 취득했지만, 학사 졸업과 석사 졸업 중간에 잠시 다른 나라에 있었다.
코피 아난의 돌변을 목격한 미국 행정부의 입장에서는 그 다른 나라가 어디인지 순간적으로 궁금해졌을지도 모른다. 그 다른 나라는 '다행히도' 프랑스가 아니었다. 프랑스 옆의 스위스였다. 제네바의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그런 뒤 MIT에서 다시 한번 석사과정을 밟은 것이다.
코피 아난은 조지 부시(아들 부시) 행정부의 '야심작'인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었다. 2003년 9월 아난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두고 "유엔 헌장에 부합하지 않는 불법"이라고 비판했다. 부시 대통령의 심기가 극도로 불편해졌음은 물론이다. 미국이 '자유와 정의의 수호'를 명분으로 벌이는 일을 유엔 사무총장이 불법행위로 규정해버린 것이다.
코피 아난이 별세한 지 2일이 경과한 20일 오전 9시 현재까지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침묵하는 데는 이런 악연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을 수 있다. 트위터를 그렇게 좋아하는 트럼프가, 코피 아난의 별세 같은 중대사 앞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한편, 국무부는 마이크 폼페이오 장관 명의로 현지 시각으로 19일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의 독무대였던 유엔, 달라지다1945년 유엔 설립 당시, 미국은 국제연합을 자기 뜻대로 활용하고 싶었다. 사무총장 역시 아바타처럼 활용하고 싶었다. 5대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에서 소련(러시아의 전신)을 제외한 나머지 4개국이 미국 자신과 친미 국가들이었으므로 그리 어렵지 않은 꿈이었다. 영국·프랑스·중화민국(타이완)은 당시에는 미국 말을 잘 들었다.
소련이 안보리 거부권을 갖고 있었지만, 미국이 유엔을 조종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유엔군 명의로 참전할 때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1950년대 중반부터 이상 징후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소련과 미국 어느 쪽에도 가세하지 않겠다는 제3세계 국가들이 유엔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결정적 계기는, 지금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나왔다.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회합을 가진 아시아·아프리카 29개국이 제3의 노선을 천명하면서부터 미국의 세계 주도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노선에 찬동하는 국가들이 유엔 회원국으로 대거 가입하면서, 미국은 유엔 총회에서의 표 대결을 더 이상 자신할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