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장인 이태룡 박사가 신청했던 의병(장) 44명이 올해 광복절 때 정부 포상을 받게 되었다. 사진은 이태룡 박사의 의병 관련 연구자료.
윤성효
"경남 의병 기록이 있던 진주법원이 방화되어..."- 이태룡 박사의 가족사에 의병과 관련해 순국하신 분이 있다고 <100년 편지>와 <순국>지에 나온 것을 보았다. 포상이 됐는지."… 포상 신청도 못했다."
- 왜 그랬는지? 무슨 연유라도?"경남지역 의병기록과 재판기록은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기록들이 사라졌으니 …."
- 경남의 의병기록과 재판기록이 사라졌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일제의 의병학살 기록은 엄청나게 많이 있고, 특히 1908년과 1909년 봄까지 경남지역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순국한 자는 1500여 명이고, 피체된 자는 1000여 명에 이르지만 재판기록이 불타버려서 없는 것이다."
- 그 재판기록이 언제 불탔는지."정확히 말하자면 1949년 10월 27일 새벽 2시 당시 진주법원이 방화에 의해 불탔고, 진주경찰서 일부가 불타면서 경찰 조사기록 일부와 재판기록은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다. 진주법원은 현재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청이지만, 경상남도 도청소재지가 1925년까지 진주에 있었다. 따라서 한말 경상남도지방법원은 진주에 있었다. 당연히 의병 재판기록은 진주법원에 있었다."
- 그러면 경남지역 의병기록이 없어진 것인데, 누가 왜 진주법원과 진주경찰서에 불을 질렀는지."범인은 50여 명의 '인민군 복장을 한 불순분자들'에 의해서 불탔다고 했으나 며칠 뒤 대구고등법원도 방화됐다. 대구고등법원은 일부 재판기록만 불타고 불을 끄게 되어 경북 의병기록과 경남과 호남의 공소 재판기록은 남게 되었다. 그 불순분자는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는 게 당시의 중론이었다."
-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들이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문서들을 불태운 것인데."그렇다. 저는 노덕술, 하판락 일행의 소행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 처음 듣는 이야기다."노덕술은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의 악질 경찰이었다고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울산 장생포 출신으로 울산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경찰이 되었고, 뒤에 통영경찰서에서 근무하면서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고문하는 등 악명을 떨쳐 서울로 갔다.
진주 명석면 출신인 하판락은 독립운동가들의 혈관에 주사기를 꽂아 피를 뽑아낸 후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를 향해 뿌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착혈 고문' 외에도 화롯불에 달궈진 쇠젓가락으로 지지는 고문, 전기고문 등을 자행했던 악질이었다. 이들의 행적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인민군 복장을 한 50여 명을 동원하여 방화한 후 2시간 동안 '조선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며 진주 시가지를 행진했다는 기록을 볼 때 이들은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고 판단한다."
- 당시는 '반민특위'가 해체되어 일제 앞잡이 경찰을 조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건가."그랬다. 노덕술도 풀려났으니까. 광복 후 수도경찰청, 오늘날 서울경찰청 수사과장이 되어 오히려 의열단장 김원봉까지 고문했었다. 반민특위는 해체되었지만, 반민특위에 고발된 사건은 대법원으로 이관된 상태였던 1949년, 그 기초자료가 되는 진주법원 기록을 불태웠던 것이라 본다."
- 그렇다고 경남 출신으로서 의병활동으로 포상을 받은 경우가 없지는 않은 걸로 안다. 노응규 의병장은 서훈을 받았는데."당연히 받았다. 노응규 의병장이야 전기의병 때 '진주부'를 점령해서 석 달 동안 경남 일원을 의병 천하로 만들었던 분이니, 국내 신문뿐만 아니라 일본 신문에도 그 기록이 있다. 더구나 후기의병 때는 당시 충북 황간군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피체되어 충북 청산경찰서를 거쳐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단식으로 순국했기에 그 자료가 있다.
경남 출신으로 당시 진주지방재판소·진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공소(항소)를 하지 않은 분들의 기록은 없다. 공소를 한 분들의 기록은 대구공소원(현 대구고등법원)에 남아 있고, 또 경남 출신이면서 타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순국했거나 재판을 받은 분은 타지의 기록에 남아 있어 현재 약 60명이 포상을 받았다."
-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인해 의병 재판기록 등이 사라져서 많은 분들의 포상 신청을 못하시게 된 것인 셈인데."저희 큰할아버지는 1870년이고, 할아버지는 1878년생이셨다. 큰할아버지 아들인 당숙은 1890년생으로 1907년에 의병에 참여하여 이듬해 6월 일본군 진주병기창을 폭파하는 과정에서 19세의 나이로 순국하셨고, 그 일로 큰할아버지는 일본 헌병대에 고문에 의해 이듬해 정월에 40세의 나이로 병사하셨다. 당시 당숙과 함께 일본군과 싸운 의병이 3명이 순국하고, 몇 명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재판기록이 사라졌으니, 저희 가첩에야 있지만, 인정받기 어려워 그냥 두고 있다."
앞으로 계획을 물었더니 이태룡 박사는 "계속 할 것"이라고 했다.
"의병 포상 신청은 계속할 것이다. 나아가 경남지역 3·1만세의거로 재판기록이 있으면서 포상이 안 된 분들의 행적을 찾아 올해 안으로 포상 신청을 할 계획이다. 그런 분은 200명 정도 되는데, 그 내용들을 정리 중에 있다. 내년 3·1절 경남 출신 포상 추서자가 대량으로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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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에서 '의병'으로... 4백여 의병 살려낸 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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