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관에 전시된 하시마(군함도) 탄광 사망자 명단.
전은옥
선생님은 참 인자하고 따뜻하고 신사적이며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분이었다. 겸손하고 온유하지만 한편으로는 올곧은 성품을 가진 어른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늘 양복을 갖춰 입으셨다. 군함도나 다카시마 같은 강제동원 현장 답사를 갈 때는 양복 정장은 아니었지만, 그때도 매우 단정한 차림새였다. 늘 몸가짐과 언행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애연가였던 선생님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늘 자리를 피해서 흡연하신 것은 물론이고, 항상 담뱃불을 잘 꺼서 담뱃재를 깔끔하게 버릴 수 있도록 휴대용 케이스를 가지고 다니셨다.
또 필자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 "감탄했습니다"라는 칭찬을 자주 하셨다. 별로 감탄할 만큼 대단치 않은 일에도 감탄사를 남발하셔서 처음에는 선생님의 습관적인 말투인가보다 오해할 정도였다. 젊은 사람에게도 늘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흔히 말하는 크고 적극적인 '리액션'으로 상대방을 열심내게 만들고 격려하셨던 것이다. 10대 청소년과 20대 청년, 80~90대 고령자에 이르기까지 다카자네 선생님은 누구에게도 예의있게 대하셨으며, 잘 어울리셨다.
의롭고 선한 인품 가지고, 불의에 무릎꿇지 않던 결연한 실천가
선생님은 프랑스 문학 전공자이기도 했다. 행동주의 문학으로 평가되는 다수의 작품을 내놓으며 위험 상황 속에서도 높은 인간성과 연대 책임 등을 강조한 소설가 생텍쥐페리와 그 작품 세계를 전공한 선생님은 시민운동가뿐 아니라, 불문학자로서도, 교육자로서도 뛰어난 공로를 남겼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의 예술공로훈장을 받고 '기사' 칭호를 받기도 했다. 같은 나가사키 대학에 몸 담았던 다른 교수나 제자들에게도 생각의 차이, 정치사회적 입장의 차이를 뛰어넘어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프랑스 문학자였던 만큼 샹송도 곧잘 부르셨다. 에디뜨 삐아쁘의 '인생의 찬가'도 부르시고, 어떤 날은 한국의 패티 김 노래도 부르셨다. 그렇게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감수성 풍부하고 따뜻한 분이면서도, 불의에 대해서는 타협하거나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일 없이 철두철미하게 맞선 행동가였다.
많은 이들이 선생님의 부고 소식에 한동안은 망연자실하였다. 필자 역시 실감이 나지 않아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선생님은 필자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 사람들의 가슴 속에도 잊지 못할 소중한 별과 같은 존재였고, 선생님이 계셨기에 나가사키라는 이국땅이 마치 제2의 고향인 듯 따뜻하게 다가올 수 있었다.
다카자네 선생님,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인생은 참 멋진 인생이었습니다. 선생님을 만나 배우고 함께 일할 기회를 얻어 영광이었고, 선생님이 베풀어주신 많은 배려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이제는 더 이상 8월 9일 아침이 되어도 선생님이 나가사키 조선인 원폭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추모사를 낭독하는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하늘나라에서 부디 편안히 쉬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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