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납북어부 서창덕 간첩 조작 사건'의 보고서
정대희
서진석(37)씨도 말을 쏟아냈다. 군산 시내 커피숍에서 인터뷰하면서 '간첩 자식'으로 살아온 날들을 끄집어냈다. 죄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간첩 새끼'라고 왕따를 심하게 당했어요. 애들한테 엄청 두들겨 맞았죠. 선생님도 저를 많이 때렸어요. '간첩 자식'이라고. 이때는 괄시받고 무시당했던 기억만 있어요.
저한테도 형사가 따라 다녔어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두 번은 제 뒤를 쫓아다녔죠. 답답하대요. 학교에 가면 맞고 안 가도 동네 형들이 때리고, 형사들이 따라 다니고. 살 수가 없더라고요.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죠. 그 애들은 저를 버리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소년원도 가고 교도소도 가고..."- 아버지와 사이가 어땠나요?"정이 없었어요. 제가 아버지 때문에 너무 당했거든요. 중학교 때인가? 제가 복싱을 했어요. 어릴 때부터 하도 맞아서 배운 거죠. 그때는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와서 같이 살 때인데, 어느 날 저를 때리더라고요. 쇠파이프로. 손뼈가 다 으스러져 운동을 그만뒀어요. 제가 소년원에 갔을 때도 아버지는 면회 온 적도 거의 없었어요. 아버지가 정말 미웠어요."
-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있나요?"한 번은 제가 아버지한테 물었어요. 왜 우리는 짜장면 한그릇도 밖에 나가서 못 먹느냐고. 아버지가 그러데요. 무섭다고. 또 잡아갈까봐 무서워서 밖에 못 나가겠다고. 아버지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았어요. 항상 아버지 뒤에는 사람이 있으니까. 저는 저대로 힘들었죠. 초등학교 때부터 가출을 반복적으로 했고, 나쁜 길로 빠지게 됐죠."
- 납골당에서 다정하게 찍은 가족사진과 편지를 봤어요"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아버지가 엄마랑 면회를 왔는데, 처음으로 우시면서 그러더라고요. 사랑한다고. 그때 정말 죽고 싶었어요. 내가 왜 여기에 있나 이런 생각도 들고. 이게 다 내 탓이구나. '나가서 아버지한테 잘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5년 만에 집에 왔는데, 아버지가 아팠어요. 제가 전주로, 서울로 병원을 모시고 다녔어요. 서울서 병원 생활 할 때는 한 달간 옆에서 병실 생활도 했죠. 그때 아버지랑 밥도 같이 먹고,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어느 날은 이불 없이 자는 저한테 점퍼를 덮어주는데, 행복하더라고요. 그 뒤로 항암치료를 받으러 여기저기 다니셨는데, 그때마다 모시고 다녔죠. 그러다가 가족사진도 찍게 됐어요. 제 인생에 가장 행복한 날이었죠."
-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찾은 게 있나요?"사실 아버지는 저한테 굉장히 폭력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더 미워했죠. 근데 나이를 먹으면서 알겠더라고요. 그게 다 저를 생각해서 그런 거란 거. 제가 피해를 볼 까봐 그런 거라고요. 그래서 아버지 주위 사람들은 아들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제가 '아들'이라고 하면, 다들 놀랐죠.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간첩'이 됐다가 무죄 판결받았으나, 어찌 됐든 '간첩 자식'이란 소리를 들을까 봐 그러셨던 거를 나중에 알았어요."
끝나지 않은 국가폭력끝으로 서진석씨와 헤어지며 약속한 게 있다. 그가 행정안전부에 가는 날, 함께 가기로 했다. 서창덕씨의 삶을, 최옥선씨의 인생을, 그리고 서진석씨의 미래를 뒤바꿔 놓은 A 때문이다. A의 훈장은 아직 박탈되지 않았다.
지금도 '고문 수사관' A는 보훈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국가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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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을 파멸시킨 수사관, 훈장 받고 별 일 없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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