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 중청가는 길에 만난 야생화 예쁘게 피어 반겨준다
임재만
산길에는 마을 쉼터 같은 곳이 종종 나타난다.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놓고 고목이 길게 누워 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고목에 앉아 정담을 나누기 딱 좋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숲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뭇잎은 어찌난 싱그러운지 어린아이처럼 마냥 천진한 표정이다. 보고만 있어도 몸과 마음이 절로 맑아진다.
중청으로 다가갈수록 다람쥐 친구를 더 자주 만나게 된다. 정겨운 마음에 손을 내밀어 보았다. 경계의 눈을 하고 멀리 달아난다. 마음을 몰라주는 다람쥐가 야속하다. 좀 더 가까이 사진도 찍고 눈인사도 나누고 싶지만 아쉽다. 꽃들만이 가까이 와서 소녀처럼 예쁜 표정을 지어 주었다. 어찌나 예쁜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오래 보고 있으면 시샘하는 벌이 날아와 훼방을 놓곤 한다. 역시 꽃은 오래보아야 예쁘고 벌과 나비가 날아들어야 제격이다.
다시 거친 돌길이 밟고 능선 길을 몇 번 더 오르내리자 중청이 코앞이다. 끝청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북쪽으로는 공룡능선이 달려가는 곳에 마등령이 막아서고 남쪽으로는 한계령 길 너머로 점봉산과 가리봉이 가물가물 솟아 있다.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귀때기 청봉에서 대승령으로 바위 능선이 힘차게 뻗어있다. 귀때기 청봉은 귀가 떨어져 나갈 만큼 겨울바람이 매서운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끝청 돌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 메고 중청을 향했다. 나무들이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대청봉이 눈에 쏙 들어온다.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은 나무하나 없는 민둥산이다. 1700고지에 이르니 나무들이 사라진 것이다.
드디어 중청에 올라섰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중청을 태워 버릴 기세다. 이때 산바람이 어디선가 살랑살랑 불어댄다.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바람을 타고 산 능선도 사방으로 달려간다. 시야가 탁 트여 막힘이 없다. 어디를 먼저 보아야 할지 마음만 바쁘다.
화채봉에서 마등령으로 시선을 가만히 옮겼다. 공룡능선의 기이한 암봉들이 시선을 멈추게 한다. 화채봉 너머로는 속초시내와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기이한 암봉들이 줄지어 들어선 설악산과 푸른 동해 바다가 어찌 이리 궁합이 잘 맞는지! 아무리 보아도 찰떡궁합이다. 어디서 이런 비경을 마주하겠는가! 보고 또 보았다. 오래보아도 지루하지 않고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어느 능선을 걸어볼까 생각하며 눈으로 설악의 능선들을 타고 넘어보았다. 어느 능선 길을 걸어도 참 좋을 것 같다.
중청대피소에서 쌀을 씻고 버너에 불을 피워 점심을 지었다. 오랫만에 짓는 산밥이라 밥이 설익어 버렸다. 짜장을 넣고 다시 끓였다. 예상과 달리 먹음직스러운 짜장밥이 되었다. 김치를 넣어 먹으니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역시 배고플 때 먹는 산 밥이 최고다.
중청에서 외설악을 세세히 돌아보고 소청으로 향했다. 봉정암으로 가기 위함이다. 중청에서 소청 가는 길은 외설악풍경을 맘 놓고 볼 수 있어 걷는 재미가 있다. 마치 천국으로 가는 길 같다. 기이한 암봉들이 솟아있는 외설악의 매력에 빠져 가다서기를 반복했다. 나무도 키를 낮추고 시야를 열어줬다. 내리막길에는 철 계단이 놓여 있어 내려가는 부담이 없다. 이따금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은 절로 야호소리를 내게 했다.
소청에 이르자 봉정암 가는 길과 희운각으로 가는 갈래 길이 막아선다. 희운각으로 내려가 비선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시원한 물에 발이라도 담그고 싶었지만 그 유혹을 뿌리치고 봉정암으로 향했다.
봉정암으로 가는 길에는 소청대피소가 있다. 공룡능선과 용아장성이 바로 앞에 펼쳐있어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소청의 일몰이 무척 기대가 되었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산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봉정암에서 용아장성로 이어지는 암봉들이 어찌나 기이한지 신들의 작품 같다.
소청대피소에서 봉정암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목탁소리를 따라 가만히 내려갔다. 얼마 되지 않아 봉정암이 나무 사이로 나타났다. 봉정암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암자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면 금세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바위들이 봉정암 뒤에 위태롭게 솟아 있다. 제법 큰 암자다. 봉정암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암자여서 신도들만 아닌 일반인도 많이 찾는다.
백담사에서 봉정암에 이르는 길은 무려 10km가 넘는다. 멀고 험한 산길이다. 봉정암에 이르기도 전에 세속의 번뇌를 모두 잊게 될지 모른다. 큰마음을 먹지 않고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다.
암자 보살님에게 숙박에 대해 여쭤 보았다. 생각과 다르게 돌아온 말투가 투박했다. 많은 사람들을 맞이하다보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봉정암은 터가 협소해 보였다. 건물들이 편안히 들어앉지 못하고 어딘지 모르게 답답해 보였다.
암자 한구석에 앉아 스님의 불경소리를 들어보았다. 불경소리가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다. 평화로움이 마음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떠날 줄을 모른다. 어느새 땅거미도 암자 깊숙이 내려앉는다. 1박하기로 예약된 소청대피소로 올라갔다.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 두세 번 쉬고 올라가야 했다. 소청대피소에는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와서 저녁을 지어먹고 있었다. 초등학생부터 70대에 이르는 할아버지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다.
저녁을 먹고 하늘을 가만히 보았다. 귀때기 청봉에서 기이한 구름이 용아장성 위로 날아든다. 석양빛은 때를 놓칠세라 구름 속을 비집고 들어가 붉은 빛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산 그림자와 어울려 멋진 그림이 돼 준다.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카메라 셔터를 바쁘게 눌러댄다. 만일 암봉 사이로 안개라도 피어났다면 어떠했을까 상상해본다. 아주 멋진 그림이 됐을 것 같다. 마치 신선이 노니는 천창의 세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