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 왠지 남 얘기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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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는 식품에 첨가당이 얼마나 함유되어 있나를 표기하려 했다가 실패했다. 식품업계의 거센 반발이 원인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댔지만, 그들의 첫 번째 주장은 식품에 당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어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잘 보면 이것은 언어 트릭이다. 즉, 질문과 다른 답을 내놓고 우기는 전략이다. 질문은 '첨가당'에 관한 것이었는데, 대답은 '당'에 관한 것이다.
식품에 얼마만큼의 당이 포함되어 있는지 정확하게 표기하는 것이 어려울 수는 있다. 하지만 '첨가당'은 식품업계에서 원재료에 추가하여 넣은 당을 말한다. 컵케이크를 만들면서 설탕을 얼마나 넣었는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고발 다큐나 사회문제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돈이 얽힌 문제에서 인간은 한없이 비열해진다. 와인, 커피, 초콜릿(폴리페놀)이 몸에 좋다는 기사가 매일 쏟아지는 배경에는 거대 자본에 무릎 꿇는 연구자들의 양심이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건강한' 대안 식단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저자에 의하면 셀리악병이나 글루텐불내증이 없는 일반인에게 글루텐 프리 식단이 건강에 더 좋다는 실험 결과는 없다고 한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그레인 브레인>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펄머터 등 반론을 펴는 사람들도 많다. 어쨌든, 저자는 '건강'이라는 브랜드가 단지 마케팅 전략일 뿐이라고 말한다.
환자들이 다이어트 식품이나 '순한', '저지방' 같은 문구가 박힌 상품을 사려고 하면 나는 대개 말리는 편이다. 이런 문구는 거짓말이다. 맛도 끔찍할 뿐 아니라 식욕을 채워주지도 못하고 소비만 늘린다.
위 인용문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라. 그리고 '건강한' 대안 식품을 먹었던 경험을 떠올려 보라. 정확한 진단 아닌가? 나는 스위스에 살 때 거의 석탄과 같은 검은 색의 '초건강' 잡곡빵을 산 적이 있는데, 그 맛은 간단히 말해 악몽이었다. 단 두 쪽에 5천 원이나 하고 벽돌과 같이 무겁던 그 빵도 소화되고 나면 다른 빵과 마찬가지로 단당류로 분해될 뿐이다. 소화가 되기나 한다면 말이다!
저자의 결론은 단순명쾌하다. 과식을 끊임없이 부채질하는 우리 시대의 소비체계는 체계 자체의 문제이다. 과식하는 개인을 탓하기에 그 시스템은 너무나 정교하고 치밀하다. 자본주의가 신성의 색채를 발하는 우리 시대에는, 많은 사회적 문제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고는 한다. 저렴하면서도 현란한 맛을 자랑하는 식품이 상점 선반을 차지하고 있는 한, 개인이 저항할 수 있는 수준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난해 <뉴욕타임스>는 비만과 가난의 관계를 다룬 칼럼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의 분명한 목표는 가난한 사람들을 날씬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덜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단지 가난한 사람들이 다이어트를 시작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가난하게 '그리고' 뚱뚱하게 만드는 제도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과식의 문제에 대해서뿐 아니라, 저자는 소비 전반에 대해 이러한 제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음식뿐 아니라 모든 것을 덜 소비하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시장 경제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경제학에도 외부불경제라는 개념이 있다. 과식, 비만, 질병이 국민경제에 끼치는 악영향은 계량하기가 어려울 뿐, 분명히 존재한다. 부정적 외부효과를 고려하면, 과식의 문제를 단지 개인의 선택에 맡겨두는 것은 정책입안자에게 직무유기일지도 모른다.
과식의 심리학 - 현대인은 왜 과식과 씨름하는가
키마 카길 지음, 강경이 옮김,
루아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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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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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규제하겠다는 정부, '무지방 곰젤리'는 어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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