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충북도당 사무실에 차려진 고 노회찬 의원의 빈소. 노 의원은 노동운동 과정에서 1989년부터 만 3년동안 청주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그는 이 시기를 '인생의 황금기'라고 회상하면서 청주를 제2의 고향이라고 말했었다.(사진 정의당 충북도당)
충북인뉴스
진보정치의 큰 별이 졌다. 열일곱 살때부터 유신반대 투쟁에 나선 이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진보정당 운동에 평생을 바친 그의 길은 외길이었다. 또 가시밭길이었다.
젊은 시절은 수배와 감옥생활, 중년 이후는 진보정당 외길에 대한 도전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노동운동가, 진보정당 운동가로서 숙명처럼 이고 가야 했던 가난했던 삶. 그 가난에 대해서도 "나무젓가락만 있으면 사막에 가서도 살 수 있다"며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넘어갔다.
노회찬 의원이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시절인 2004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충북 청주를 제2의 고향이자 이곳에서 보낸 시절이 인생의 황금기라고 했다.
왜 청주는 노회찬 의원에게 황금기였을까?
지난 2004년 한 스포츠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노회찬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감옥에 가니까 정치범이라고 독방 주잖아. 나는 '와! 내방 생겼다'는 기쁨, 누가 날 감시하는 것도 없고. 눈치 안 봐도 되잖아. 수배자 때는 상상도 못했지. 청주가 제2의 고향이야." 그랬다. 노회찬 의원은 1989년부터 꼬박 3년을 청주교도소에서 보냈다. 그때 노 의원의 나이는 34세.
그가 회고했던 감옥생활의 키워드는 독방, 영화, 테니스, 식빵에 요구르트를 부어서 만든 술이다.
왜 영화일까. 노 의원은 이렇게 얘기했다.
"정치범들은 다른 재소자들을 물들인다고 따로 모아놓고 영화 보여주는데, 맨날 폭력영화야. 교화하는 곳인데 폭력영화라니. 그래서 면담 신청을 해서 영화는 우리가 선정하게 됐지. 그런데 갈등이 생긴거야. 주윤발 나오는거 보고 싶어하는 거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재미없다는 거야. 그래서 '야 임마! 톨스토이 안 보겠다는 거야. 그러고도 운동권이야?' 다 후배니까 할 말이 없지, 그런데 내가 봐도 재미가 없어. 전쟁 장면 나올 땐 좀 보고 평화 장면에는 자고. 그때 위신이 실추됐지."술은 어떻게 확보했을까? 노 전 의원은 "술은 식빵에 요구르트 부어서 만들어 먹었지. 식빵에 이스트 남아 있잖아. 누런 테두리 벗겨내고 페트병에 넣어서 요구르트 부어 따뜻하게 하면 막걸리 도수가 나와. 그런데 알코올 도수를 높이려고 부단히 노력을 해. 원기소가 이스트 덩어리잖아"라고 말했다.
이스트 역할을 하는 '원기소'는 어디서 가져왔을까?
노 전 의원은 "의무실에 가서 '갑자기 기력이 없다. 아프다. 원기소 먹으면 나을 것 같아요'해서 얻어 온 원기소를 넣으면 알코올 도수가 2도는 높아져요. 면회온 사람들이 '뭐 필요하냐'고 하면 '요구르트 200병 넣어주세요'라고 했다"고 말했다.
가장 고통스러웠을 감옥 생활속에서도 노회찬 의원은 '낙천주의자'의 모습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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