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7일자 <경향신문>에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소식과 함께 계엄포고문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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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다니던 국민학교 정문과 동네 목욕탕 담벼락엔 계엄포고문이 나붙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포고문의 몇 구절이 내내 마음이 쓰이셨다. "일체의 옥내외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하며, 시위 등의 단체 활동은 금한다." 또 야간 통행금지 시간을 2시간 앞당겨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로 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상기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며 엄중 처단한다"는 경고까지 적시된 9항의 포고문 끝에는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정승화'라고 되어 있었다.
대통령의 죽음도 큰일이지만, 장남인 아버지에겐 할머니의 환갑잔치도 중요했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환갑잔치는 도대체 옥내외 집회에 속하는 것인지, 또 계엄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지 답답했던 아버지는 직접 경찰서를 찾아가 문의했다. 관혼상제와 종교행사는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답변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아버지는 마음을 놓았고, 우여곡절 끝에 할머니 환갑잔치는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일요일이었던 그날 저녁 TV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이 등장해 대통령 시해사건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 이라는 이름이 국민 앞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40여 일 후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사조직을 동원, 상관인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군을 장악했다. 12.12 쿠데타였다. 그해 겨울부터 다음 해까지 돈암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던 고모 댁에 심부름을 갈 때마다 고려대 학생회관 앞에 서 있던 계엄군 장갑차들을 볼 수 있었다. 버스 안 어른들은 목소리를 낮춰 수군댔지만, 철없던 소년은 장갑차를 보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6학년이 되었던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 환갑잔치가 있던 날 텔레비전에서 봤던 그 군인은 대통령이 되었다.
좀 더 나이를 먹으면서 의문이 하나 생겼다. 쿠데타를 방지하는 '대(對)전복 임무'를 주요 업무 중 하나로 삼고 있는 보안사령관이 어떻게 군사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강산이 거의 4번 바뀌는 시간이 흐른 지금, 보안사의 후신인 기무사가 작성한 '전시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 대비계획 세부자료를 보면서 비슷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
혹자는 기무사의 특성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한다. 5.16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했던 군사정권은 자신들이 했던 방식으로 자신들의 정권이 뒤집어질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장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보고하도록 보안사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1990년 민간인 사찰이 드러난 후 기무사로 이름을 바꾼 뒤에 들어선 문민정부는 기무사가 작성해 올리는 각종 보고서 없이도 군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다.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했고, 군사재판에서 사형까지 언도받았던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한 후 기무사 개혁을 추진했지만, 큰 진전을 보지는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독대보고를 폐지함으로써 정보의 민주적 유통이라는 부분적 개혁을 이루어냈지만, 기무사 자체를 개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정권이 다시 보수로 넘어간 후 기무사는 민주정부 10년간 숨죽이고 있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사찰과 감청뿐만 아니라 인터넷 공간을 통한 여론 조작이라는 이전에는 없었던 행태도 보였다.
2014년 10월 단행된 군 인사에서 당시 조현천 국군사이버사령관은 기무사령관에 임명됐다. 군내 사조직인 알자회(1976년 육군사관학교에서 결성) 출신의 조 전 사령관은 기무사의 감시와 사찰을 누구보다 많이 받았던 피해자로 비쳐졌기에 그가 강도 높은 기무사 개혁을 하리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했다. 실제 조 전 사령관은 취임 초기 언론사를 초청해 개혁 관련 세미나를 여는 등 이전에는 없었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일각의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