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입양인 보 페르손일곱 살 때 스웨덴으로 떠났고, 스물 다섯 살에 한국에 다시 방문해서 낳아준 부모를 찾았다. 그는 입양 전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정현주
그가 입양된 곳은 스웨덴 샌드비켄시 부근의 마을이었다. 이 마을 중심에는 대략 1500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고, 외곽에는 40명 정도가 흩어져서 드문드문 살고 있다. 페르손은 그 외곽 지역에 있는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아버지는 키가 194센티미터나 되는 장신의 사냥꾼이었다. 엘크(말코손바닥사슴) 사냥을 했고, 집에 아버지가 사로잡은 스크베이더(뇌조) 두 마리가 있었다.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는데 빨간 머리에 키가 작았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는 목소리가 크고 수다스러웠다. 어머니도 다정다감한 편은 아니었지만, 페르손은 그녀와 친했다. 형은 사냥을 좋아해서 아버지를 따라다녔고, 페르손은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어머니는 제빵이나 요리를 좋아했고 잘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요리를 배웠고, 흥미를 느꼈다. 또 형과도 친하게 지냈고, 재미있게 놀며 컸다.
워낙 작은 마을에 살았고, 그곳에서 입양인은 페르손네 형제들뿐이었다. 그래서 인종차별의 경험은 거의 없다. 가끔 몇몇이 차별적인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강한 성격의 어머니가 보호하고 막아주었다. 작은 마을이다 보니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친구들과 다녀서 서로 매우 친했다. 어쩌다 전학생들이 오면, 처음 만난 페르손의 외모를 놀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 그는 혼자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이 보통의 스웨덴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무리에서 한 발짝 뒤로 떨어져서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때 성격도 좀 내성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겪고 난 뒤에는 다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에게 한국에서 생부를 만났을 때의 느낌을 물었다.
"낯설었어요. 내 머리 속의 그분은 젊고 크고 건장했는데, 다시 만났을 때는 생각보다 작았고 늙고 초라해져서 믿어지지 않았죠."생부는 페르손이 생모를 만나는 것을 반대해서 도와주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어찌해서 겨우 연락이 됐고 공항에서 낳은 어머니를 만났다. 스웨덴으로 떠나는 비행기 출발 세 시간 전이었다. 그녀는 울기만 했다. 잠시 안아드린 게 다였다. 말도 통하지 않아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멍한 상태로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안에서 비로소 눈물이 나왔다.
생부와는 관계는 이어지지 못했다. 생부는 새로 가정을 이루고 있었고, 그들 가족은 페르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페르손은 낳은 어머니와 길러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물었다. 두 사람에 대한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생모와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돌아가신 어머니보다 친밀감이 덜하죠. 돌아가신 어머니는 워낙 다정다감한 편은 아니었지만, 함께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당연히 길러준 어머니가 저에게는 더 안전한 느낌, '엄마'라는 느낌을 주죠. 그렇지만 낳은 어머니와도 더 가까워지고 싶습니다."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생모와의 소통에는 언어 이외의 장벽이 있다. 페르손을 소개한 한국인 지인은 그의 생모가 페르손을 입양 보낸 뒤 결혼했음을 알려주었다. 이미 70이 가까운 나이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페르손의 존재를 가족에게 드러낼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을 포기한 생부모에 대한 원망은 없었을까? 고아원에 맡겨져 외로웠던 시간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고, 처음 스웨덴으로 가서 한국을 그리워했던 시절이 있었으니 없었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짧게 대답했다.
"지금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입양은 저에게 좋았다고 볼 수 있죠. 저는 지금 건강하고 잘 살고 있으니까요. 다만, 입양 가는 과정에서 홀로 비행기를 타거나 했던 절차가 좀 별로였던 것 같아요.""자녀들에게 '가족의 역사'를 만들어주고 싶습니다"페르손이 생부모에게서 양육되거나 한국에 남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해외 입양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고아원으로 달려가 그를 집으로 데려갔던 젊은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라는 가족의 만류는 비정한 것이었을까? 그러나 어쩐지 그 말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매우 상식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경제적 지원만 있으면 모든 생모가 자녀를 기를 것이라는 가정은 이 상식적인 한 마디에 힘없이 무너질 수 있다.
미혼모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는 사회에는 그와 비슷한 정도로 입양 가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존재한다. 스웨덴에는 미혼모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거의 없고, 제도적 경제적으로 단단히 뒷받침해주기 때문에 직접 양육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입양을 쉬쉬하지도 않아서 한국처럼 비밀입양도 없다. 한국은 전체 입양의 70%가 비밀입양이다.
미혼모들이 자유롭게 입양 또는 양육을 선택할 수 있고, 입양아동들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가 되면, 한국의 시설 아동들이 부모를 찾아 해외로 멀리 떠나는 일도, 돌아와 떳떳이 부모를 만나지 못하는 일도, 아니 시설에 아동들이 더 남아 있을 일도 없지 않을까?
페르손은 두 번 결혼과 이혼을 했다. 그리고 세 명의 자녀들을 자신이 맡아서 양육하고 있다. 7살인 막내는 아직 아니지만, 10대가 된 위의 두 자녀는 한창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드문 혼혈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자녀들이 한국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번 방문도 자녀들과 함께 했다. 3년마다 열리는 IKAA(세계 한인 입양인협회) 행사에도 꼬박꼬박 참여한다며 그는 말했다.
"아이들이 한국 문화와 음식을 좋아해요. 저는 가족의 히스토리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한국 방문을 통해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도 한국에 더 자주 오기를 원합니다."스웨덴인이면서도 한국인인 보 페르손, 그가 그의 자녀들과 써내려가는 역사가 아름다운 것이 되려면, 우리 사회도 견고한 혈연 중심 가족주의의 틀을 깨고 더 행복해져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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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 년의 교직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 절망과 섬세한 고민, 대안을 담은<경쟁의 늪에서 학교를 인양하라(지식과감성)>를 썼으며, 노동 인권, 공교육, 미혼부모, 입양 등의 관심사에 대한 기사를 주로 쓰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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