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의 기본 소득 관련 기사
BBC
지난 4월, 핀란드 정부가 지난해부터 진행해온 '기본 소득 실험'을 더 연장하지 않고 예정대로 올해 말쯤 매듭짓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로 타전됐다. 실험을 맡은 핀란드 사회보장국(KELA)이 실험 연장을 요청했으나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자 정부가 이를 거부했다는 게 기사의 주장이다. 진원은 <BBC>, <가디언>을 비롯한 영국 매체들이었다.
"핀란드 기본 소득 실험, 확대 계획 없어"(BBC)
"핀란드, 2년 지나면 기본 소득 실험 마감"(가디언)
세계가 지켜보는 실험이었던 만큼 기사는 빠르게 퍼졌다. 우리나라 언론들도 부지런히 기사를 옮겼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논조가 조금씩 변했다. 첫 날 기사를 쓴 <한국일보>는 <텔레그래프>의 제목을 그대로 옮겨 "핀란드, 조건 없는 '기본소득' 실험 마감"으로 제목을 달았지만, 하루 지나 나간 <조선일보> 기사의 제목은 "'나랏돈 풀어 기본소득 보장' 핀란드의 2년 실험 실패로"였다. 게다가 "국민에게 무조건 돈을 주는 유례없는 실험이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내, 사실상 실패한 것이라고 BBC는 평가했다"고 주장했는데, <BBC>와 <가디언>, <텔레그래프> 기사 어디를 봐도 '실패(Failure)'란 단어는 없다.
이튿날 사설들은 한 발 더 나갔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실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중앙일보), "핀란드 기본소득 포기… '현금 쥐여주기 복지'의 실패"(동아일보), "핀란드 기본소득 포기…文정부 '세금으로 월급' 접으라"(문화일보) 등, 제목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핀란드 사회보장국은 첫 보도가 나간 다음 날 "보도와 달리, 핀란드의 기본 소득 실험은 2018년 말까지 계속될 것이다"란 긴 제목의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보편적 기본 소득에 대한 핀란드의 실험적 연구를 다룬 정확하지 않은 보도들이 있었다. 실험은 계획대로 2018년 말까지 진행될 것이다... 현재로선 2018년 이후 실험을 지속하거나 확대할 계획은 없다."
또 결과 분석은 실험이 모두 끝난 뒤에 시작할 것이므로 전체 실험의 고용 효과(이 실험은 고용률 변화를 확인하려는 실험이다)는 2019년 말이 지나야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실험의 성패는 아직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는 뜻이다.
몇 가지 의문은 남는다. 사회보장국이 실험 연장을 공식 요청한 게 사실인지, 만일 공식 요청이 있었고 정부가 거절한 게 맞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 핀란드 정부가 답하지 않은 의문들은 남아있다. 또 실업자만을 대상으로 한 이번 실험을 과연 온전한 '기본 소득' 실험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처음부터 논란거리였다.
그러나 이번 혼란은 단지 정보 해석의 차이나 '기본 소득'이란 정책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삐딱하게 기사를 쓴 외신들이나, 이를 받아 섣부르게 결론을 낸 한국 언론들 모두가 이해하지 못한 건 '기본 소득'이 아니라 '실험'이었다.
'실험의 나라' 핀란드 핀란드 정부는 지난 몇 년간 정책 수립 과정을 개선할 방법을 찾아왔다. 이론적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실험적이면서 구체적 근거(evidence)에 기반을 둔 접근법을 찾는 게 목표였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새로운 정책의 도입이나 정책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는 과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실업자 2000명을 뽑아 아무 조건 없이 2년간 달마다 560유로(74만 원)를 지급하고 그 효과를 분석하는 대규모 실험을 진행할 수 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