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3일 피해자 인터뷰2018년 7월 13일 피해자 인터뷰
이정진
주연은 조사과정에서 입었던 '2차 피해'에 대해 사과받고 싶었다. 그러나 양성평등센터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양성평등센터는 조사 과정에서 관련 발언이 오간 것에 대해선 인정했지만, 2차 피해였다는 부분엔 동의하지 않았다고 주연은 말했다.
"양성평등센터 담당자는 자신들이 4월 8일 속기록을 확인해보니 '2차 가해가 아니었고 단지 예를 들어서 설명한 거였다'고 해요. 하지만 저는 제 사건과 달리 저항의 강도가 높은 사례를 들며 제 생각을 묻는 것이 2차 가해로 느껴졌어요. 그런데 그 담당자는 그렇게 느꼈으면 유감이래요. 2차 가해로 받아들인 제 잘못이라는 식으로 들렸어요."사건 파악을 위해 질문했다고 하더라도 부적절한 표현으로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피해자를 위축시켰다면 제대로 된 사과가 있어야 한다.
주연은 양성평등센터에 4월 8일 조사위원회의 속기록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자신이 받았던 2차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당사자인 자신이 보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양성평등센터는 그녀의 요청을 거절했다. 시행세칙 제2조 3항과 제5조 3항에 근거해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제2조 (사건관련자 보호) ③ 사건 처리를 위한 제반 절차는 공개하지 아니함을 원칙으로 한다.
제5조 (비밀유지의 의무)③ 사건당사자가 사건에 대한 자료 열람을 요청한 경우, 관계 법령을 위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에 응할 수 있다. 단, 사건관련자의 보호가 필요한 경우와 사건 처리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는 경우, 그 밖의 관계 법령에 따라 공개하지 않을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열람의 범위를 제한하거나 열람을 불허할 수 있다.
상명대학교 '성희롱 및 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 시행세칙 중에서
주연은 양성평등센터의 주장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2018년 5월 18일에 센터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당시 센터 직원은 센터장, 총장과 함께 속기록을 확인했다고 했다. 학교 관계자들은 속기록을 확인했지만, 당사자인 자신은 열람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주연은 센터의 태도에 막막해졌다.
그녀는 지금도 속기록 공개를 요청하고 있다.
보호받지 못하는 피해자들성폭력 전담기구의 존재 이유는 피해자 구제다. 하지만 이를 지원하기보다는 사건을 조용히 마무리하려 하는 곳이 많다. 대학 내 성폭력 전담기구는 왜 피해자 보호를 최우선으로 지키지 못하는 걸까. 이유는 분명하다. 구조적으로 2가지의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전문성 결여다. 전담인력이 부족하다.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한 대학교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학내 상담기구에 전담인력을 배정한 경우는 전체 대학의 약 7%로 그쳤다. 나머지는 상담업무와 일반 행정을 병행하고 있어 성폭력 상담에 집중하기 어렵다.
상담전담인력의 대부분이 계약직 형태로 고용된 점도 문제다. 2015년 한국대학성평등상담소협의회가 전국 95개 대학의 성폭력 전담기구 상담원을 설문조사한 결과, 상담기구 종사자의 53.7%는 기간제 계약직이었다. 한 마디로 성폭력 전담기구가 실무 능력을 축적하기 어려운 구조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는 경우도 이 때문이다.
센터장의 전문성을 검증하는 절차도 필요하다. 대체로 센터장은 교수가 맡는다. 경북대에서는 대학원생을 상습 성추행한 교수가 2016년 성폭력상담소장(현 인권센터)을 맡았다는 사실이 지난 4월에 밝혀졌다. 성폭력상담소장 임명이 별도의 자격이나 검증 절차가 없는 보직이라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둘째, 독립성 문제다. 센터장 임명 문제는 성폭력 전담기구의 독립성으로 이어진다. 상담소 직원도 같은 교수이기 때문에 동료 교수가 가해자로 조사를 받을 경우에는 입장이 더욱 난처해진다. 이는 성폭력 전담기구가 교수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암시한다.
"학교에서 남자 교수님들은 (우리 센터를) 너무 불안해하시고 싫어하세요. (우리 센터는) 공공의 적이에요. 오늘 아침에도 직원 한 분이 그 주변에서 압력받는 게 힘드시다고 그만두겠다고 했어요(B대학 성폭력전담기구 담당자)."교육부는 지난 5월 30일 '대학 성폭력 근절을 위한 제도 개선 권고'를 제시했다. 동료 교수 등 내부자 위주로 위원회가 구성될 경우, 조사·심의 및 징계 과정에서 사안의 공정한 처리를 저해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했다.
○ 심의·조사위원회 구성 시 교직원, 학생 및 외부위원을 참여시키고, 위원 성별을 균형 있게 구성한다.
○ 성폭력 사안 관련 징계위원회 구성 시 관련 분야 전문성을 갖춘 외부위원(성폭력 전담 국선변호사 등)을 반드시 포함하고, 위원 성별을 균형 있게 구성한다.
교육부 <대학 성폭력 근절을 위한 제도 개선 권고> 중에서
성폭력 전담기구 독립화는 필수적이다. 센터는 학생이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하는 곳이며, 사건을 최초로 인지하고 조사하는 과정을 담당한다. 성폭력 전담기구가 어떻게 조치하는지에 따라 이후에 진행될 사법절차도 영향을 받는다.
현재 성폭력 전담기구의 역할은 학교마다 천차만별이다. 센터장의 의지나 전문성에 따라 사건 진행이 원활하게 이뤄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대학 내 성폭력 문제는 결정권자의 선의에 맡길 수 없다. 제도적으로 명확히 정비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