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동촌에는 1944년 당시 일본군 '위안부' 강제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지는 건물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이 일대에는 일본군 전투 비행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정만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몇 명이나 될까? 여성가족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은 "일본군 '위안부'의 총수는 최소 3만에서 최대 40만 명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며 연구자마다 많은 차이를 보인다"라고 말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도 일본 우익 학자 2만, 중국 연구자 40만으로 소개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의 숫자가 연구자마다 차이가 심한 것은 일본이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944년 8월 23일 일본은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공포, 12세부터 40세 사이의 우리나라 여성들을 강제로 징집했다. 이전부터 저질러오던 행위를 마침내 법적 정책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법제화를 근거로 일제는 강제 징집에 저항하는 경우 벌금을 부과하고 투옥했다. 결국 끌려간 여성들은 낮에는 탄약 운반 등 중노동을 하고, 밤에는 '위안부(military sexual slavery)'로 혹사당했다.
'위안부' 강제 수용소, 국내에도 있었다우리나라 여성들은 일본, 만주,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평양의 섬들 등지로 끌려갔다. 일본군은 우리나라 여성들을 트럭에 싣고 다니면서 군수품처럼 취급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외딴 섬에 버리고, 자살을 강요하고, 집단 학살했다. 생존한 일부도 귀국 후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다.
국내에도 '위안부' 강제 수용소가 있었다. 당시 대구 동구 검사동에는 일본 전투 비행단이 주둔했다. 일제는 군부대 인근의 2층 건물에 '위안부' 수용소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여성들을 감금했다.
2012년 8월 12일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을 추진 중이던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일제 '위안부' 만행의 현장이 남아 있는 대구에 역사관을 건립해야 한다면서 '대구 시민 걷기 대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드디어 역사관이 건립되었다. 역사관은 1919년 대구만세운동 시위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며 행진했던 서문로 중심부에 자리를 잡았다. 역사관에는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희움은 '희망을 모아 꽃을 피운다'는 의미이다.
만세운동로에 세워진 '위안부' 역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