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이 떠오르는 날이면, 수현은 핸드폰 플래시를 켜놓고 잠에 들어야 한다.
이정진
['미투는 졸업하지 않는다' 이전 기사] 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날 성추행한 선배가 말했다 ② 성추행 당한 여성 교수는 왜 대학을 나와야 했나 '어두운 방'은 그녀의 옛 기억을 끄집어낸다. 몇 년이 지나도, 수연은 어둠으로 가득 찬 과실이 종종 떠오른다.
2013년, 새로운 학기가 시작될 쯤이었다. 수연(가명, 당시 21살)은 친한 동기 몇 명과 술자리를 가졌다. 서울 소재의 한 대학에 다녔던 그녀는 동기들과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함께 어울려 노는 일이 잦았다.
당시 가족 문제로 힘들었던 수연은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이 터진 수연을 달래주겠다고 나선 이가 있었다. 그녀의 절친한 남자 동기 정훈(가명, 당시 21살)이었다. 정훈은 늦었다며 친구들을 먼저 집에 보냈다. 술에 많이 취한 수연을 자기가 보살피겠다고 했다.
정훈은 그녀를 과실로 데려갔다. 수연은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기숙사와 과실은 10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기숙사에 사는 자신을 왜 과실로 데려가는지 몰랐지만, 그녀는 신경 쓸 경황이 없었다.
그가 타야 하는 대중교통의 막차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자신을 과실에 두고 갈 줄 알았지만, 정훈은 집에 가지 않았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었던 수연은 과실 소파에 몸을 기댔다.
비몽사몽 간에, 정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편하지 않아? 편하게 바지 좀 벗고 있어."'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수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때는 정훈이 한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잠을 청했다.
기절하듯 잠들었던 수연은 이상한 기운에 눈을 떴다. 덩치가 산만 한 정훈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이미 정훈은 수연의 바지를 벗기고 윗옷 안에 손을 넣고 있었다. 과실에는 수연과 정훈, 둘뿐이었다.
무서웠다. 이미 자신의 옷은 반 이상 벗겨진 상태였다. 수연은 이 상황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당시 수연과 정훈은 친한 친구 사이였을 뿐이었다. 수연은 남자친구가 있었고, 정훈도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고 수연에게 털어놓았었다.
'내가 여기서 깨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그 순간, 조잘조잘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과실 문이 열렸다.
정훈은 잽싸게 자신의 과점퍼로 수연의 하반신을 가렸다. 여자, 남자 후배 무리가 들어왔다. 정훈은 수연이 자고 있으니 나가라고 후배들에게 말했다. 후배들이 나간 후, 정훈은 수연의 옷을 대충 추스르고 옆 소파에 앉아 잠들었다.
"기억하지 말자, 말자, 말자..."완전히 잠에서 깬 새벽 어스름, 그녀는 정훈 몰래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 안에 들어와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잘못이야, 내가 왜 술을 먹었지? 내가 왜 취해서 잠들었지?'수연은 자책했다. 술을 많이 먹은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했다.
어젯밤 일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정훈을 계속해서 학교에서 봐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했다. 당장 내일 아침 수업에서도 그를 마주해야 했다. 신고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앞으로의 학교 생활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고민 끝에 수연은 먼저 정훈의 반응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라고 믿었다.
다음날, 수업이 시작되기 5분 전에 정훈이 교실로 들어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수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수연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 틈을 타 정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정훈 : "어제 기억나?"수연 : "너는?"정훈 : "어제 너 엄청나게 취했었어. 취해서 과실 소파에서 뻗어서 잤잖아."수연 : "너는?"정훈 : "난 옆에 소파에서 잤잖아."정훈은 아무렇지 않게 수연을 대했다. 주변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수연의 머릿속을 채웠다.
'지금 내가 어제 일을 기억한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대하는 정훈을 보니 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내가 기억을 하지 않으면 없었던 일이 되겠다. 기억하지 말자, 말자, 말자.'수연은 끊임없이 그날의 일을 잊으려 노력했다.
성폭력 사건 당시에는 사건마다 피해자의 상태가 다르다. 사건 직후 많은 피해자들은 마치 몸과 마음이 마비된 듯 느끼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혼돈스러워 한다. 어떤 피해자는 극심한 심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성폭행이 일어났다는 것을 부인하기도 한다. - 김미리혜, 성폭력의 심리적 후유증, 정신건강정책 포럼5, 2011, 12, p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