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하면, 왜 꼭 이런 장면을 떠올릴까.
최은경
사실이다. '그 남자'는 소개팅을 하고 애프터가 없었다. 대신 아침마다 문자를 날렸다. 좋은 아침이라는 둥, 좋은 하루 보내라는 둥. 가끔은 드라마 속 명대사도 보내왔다. 뭐 하자는 건가, 그랬다.
그러길 두달 여. 9월에 처음 만났으니, 11월 중순쯤 되었을까. 문자만 주고 받던 우리가 드디어 만났다. 내 노트북이 고장나서. 내 푸념을 듣던 그 남자가 한번 봐주겠다고 한 거다(우리는 한동네에 살았다).
그렇게 두 달 만에 노트북 때문에 한번 더 보고, 가볍게 '캔커피'를 마신 뒤 헤어졌다. 그리고 나서 본격적으로 만났다. 그러고도 '그 남자'가 "사귀자"는 말을 안 하는 거다. 뭐지? 친구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추측이지만, 그 남자가 다른 여자와 나를 재고 있는 게 확실하다는 거다.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내 마음이 '그 남자' 쪽으로 조금씩 기울고 있어서 그랬는지 그의 말을 기다리고만 있기 답답했다. 이런 밀당이 싫었다. '내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아닌데, 누가 먼저 말하면 어때?' 그래서 내가 말했다.
"지금 우리 사이는 뭔 거야? 사귀는 거 안 할 거면, 그냥 그 대학원생 만날 거다."그랬더니, '그 남자' 하는 말.
"내가 해봐서 아는데, 공대 대학원생 별로야."그날로 우리는 사귄 지 1일이 됐다. 그리고 2년 후 '그 남자'는 남편이 됐다. 이런 이야길 애들에게 해줬다. 그런데 애들이 놀리기 시작한다. 여자가 먼저 고백했다고! 아니 이게 놀림받을 일인가.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고백은 남자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즐겨봤던 동화, 드라마, 만화 미디어 속에서 대부분 고백은 남자가 했다. 그러니 이런 반응일 수밖에.
- 심샘... 저 좀 억울해요. "엄마, 멋있다"는 말 들을 줄 알았는데... "이런 재미난 연애스토리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기자님의 멋진 고백도 '그 남자'의 유치하지만 사랑스러운 대답도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걸요. 그런데도 '여자가 먼저' 고백했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에게 놀림 거리가 되다니 억울하실 만해요. 캬캬. 고백을 받는 쪽이 좀 더 우쭐우쭐한 추억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누가 고백해야 한다는 법칙이나 공식은 없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전설처럼 들려오는 '고백공식'이 있는 거 같아요!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우리가 누군가와 연애나 사랑 이야기를 나눌 때 '여자는 사랑을 받아야 행복하다', '남자가 고백을 해야 그 관계가 오래 간다', '여자가 먼저 고백을 하면 평생 마음 고생한다'와 같은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들었던 적 다들 한번쯤 있지 않나요?
- 맞아요. 그래서 속마음과 달리 행동하는 경우도 많죠. 아이들도 은연 중에 깃든 고정된 성역할이 있는 것 같아요."많은 가치관과 고정관념들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휙휙 바뀐다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그리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들도 여전히 있지요. 말씀하신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어요. 아차, 성역할이라는 말이 좀 생소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 '여자다움', '남자다움' 그런 거 말하는 건 아닌가요?"네, 맞아요. 성역할이란 '여성'이나 '남성'과 같은 '성별'에 따라 사회 문화적으로 요구되어지고 요구하는 외모, 태도, 행동 등이라고 설명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여성에게 '상냥하고 친절해야 한다, 아이를 꼭 낳아 엄마가 되어야 한다, 앞에 나서서 리더가 되기보다 뒤에서 잘 도와야 한다, 성적인 욕구를 너무 드러내면 안 된다' 등을, 남성에게는 '말을 적게 하고 과묵해야 한다', '울면 남자답지 못하다', '가장으로서 가족의 경제를 다 책임져야 한다', '힘쓰는 일은 모두 남성이 해야한다' 등 같은 거죠.
이런 고정관념은 알게 모르게 말과 행동으로, 나와 다른 사람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런 모습으로 전달되고 때로는 강요되기도 해요.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 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모습'인지 알 수 있답니다.
여성도 다른 사람을 무뚝뚝하게 대할 수 있고, 자신이 가진 성적인 욕구를 드러낼 수 있고, 남성도 슬프면 울고 신나게 수다를 떨고 힘과 의지에 따라 무거운 걸 들지 못할 수 있어요. 이렇게 모습, 성격, 감정, 할 수 있는 일 등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남자든 여자든 얼마든지 먼저 좋아하고 고백할 수 있어요. 있어야 하구요. 이런 부분을 성별에 따라 결정하고 고정시켜 놓은 후 거기에서 벗어나면 '여성스럽지 못하고 남성답지 못하다', '여자행동, 남자행동' 등의 말로 평가하고 구분한다면 나답게 살아가기가 정말 어려울 거 같아요.
특히 어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 아이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런 고정관념에 빨리 노출되고 가감없이 흡수하기 때문에 자기 성별에 따른 고정된 역할을 당연하게 여기기 쉬워요. 즉 우리 어른들의 노력이 정말정말 필요한 부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