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반겼다. 오죽하면 크산티페라는 악처에게서 벗어나려고 독배를 들이켰다는 말이 다 나왔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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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육체가 영원히 사는 것, 또는 그 육체가 되살아나는 것에 비해, 영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이 가진 호소력은 무서울 정도로 강력하다.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다가올 처형을 환영하고 있었다.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죽음이란 곧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독약을 마시고 평안하게 죽었다. (140쪽)영혼 담론의 강점은 무엇보다 육체의 죽음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대개의 종교가 제시하는 천국은 영혼을 수용하는 곳이다. 문제는 영원을 사는 영혼이 행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영원이란 우리의 상상을 벗어나는 개념이다. 아무리 기쁜 일이라도, 그것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과연 기쁠까?
한 기독교 안내서는 내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질투나 경쟁, 거짓, 부패와 소문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모두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223쪽)일단 모두가 모두를 사랑한다는데, 과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든다. 저자도 지적하듯, 저렇게 천사 같은 모습으로 재탄생한 사람이 과연 나와 동일한 사람일까? 내세의 영광된 모습은 또한 인간 중심적이다. 예컨대 천국에 고기가 넘쳐난다면, 동물들에게 그것이 천국일까? 미녀 72명을 거느리는 이슬람 남자들의 천국에서 여자가 과연 행복할까?
논리적 허점에도 불구하고, 영혼과 내세에 관한 관념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강력하다. 우주적 정의가 어딘가에서, 우리가 죽은 다음에라도 지켜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불의에 가득 찬 세상을 용납할 수 있단 말인가.
엄청난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영혼 담론 역시 우리에게 불멸을 약속해주지 못한다. 의식이 뇌 활동에 기인한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입증이 끝났다고 봐야 한다. 전두엽 절제술을 받은 환자가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듯이, 뇌 일부만 파괴되어도 자아, 즉 영혼은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그런데 뇌가 완전히 부패하여 사라지는 죽음에 직면하여 영혼이 어떻게 보존된다는 말인가.
죽음으로 인해 두뇌가 완전히 파괴된 상태에서도 영혼이 과거의 인지 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제 두뇌의 일부만 파괴됐을 뿐인데도 인지 능력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들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254쪽)네 번째 영생의 방법은 다름 아닌 유산(legacy)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요절했지만 불멸의 기록을 남겼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저자가 적절하게 지적하듯, 우리는 두 개의 세상을 살아간다. 하나는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하는 자연의 세상,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간들만이 공유하는 상징의 세상이다. 우리의 육체가 첫 번째 세상을 등진 다음에라도, 우리는 밈(meme)의 형태로 두 번째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불멸의 이름으로 남기 위해 아르테미스 신전에 불을 지른 헤로스트라투스는 물론, 그의 욕망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그에게 기록말살형(damnatio memoriae)을 내린 당시 사람들 역시 유산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을 어느 정도는 믿었다고 볼 수 있다.
자손 역시 유산의 한 형태다. 리처드 도킨스는 우리가 유전자의 운반기계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이나 고양이와 같은 개체가 아닌, 그 개체를 지배하는 유전자를 생명의 기본 단위로 본다면, 우리는 계속하여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남성들은 스스로 아기를 낳을 수 없기에 전쟁을 벌이거나 글을 쓰는 셈이다. (307쪽)하지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라는 의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잠을 설친다. 나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내 자손의 의식이 나의 의식과 다름은 명백하다. 명성을 남긴다고 해서 의식이 함께 남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