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시는 ‘2017 영천, 춤으로 물들이다’를 통해 노계의 문학과 한국 전통춤의 결합을 시도했다.
영천시청 제공
여든둘 세상을 뜨는 날까지 '예술을 향한 정열' 멈추지 않아 영천으로 돌아와서는 옛 성인과 현인들의 책을 읽고 그들의 뜻을 마음 깊숙이 새기는 일을 지속했다. 그가 꿈에서 주공(周公·중국 주나라 시대의 정치사상가)을 만나 받았다는 네 글자 '성·경·충·효(誠敬忠孝)'. 그는 죽음을 맞을 때까지 이 글자들이 품은 의미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초야에 묻혀 지냈으나 그의 품성과 문학적 기량을 알아본 인근 벼슬아치들은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면 그를 초청해 시조 한 수를 청하는 낭만적인 풍경도 연출했다.
50대에는 '독락당' '소유정가' 등을 지었고, 회갑을 넘겨서도 예술적 정열을 그대로 간직하며 '입암이십구곡'과 '영남가' 등을 지었다.
'권주가'와 '상사가'는 나이 일흔을 넘겨 쓴 것들이고, 가사문학 연구자들이 "보기 드문 놀라운 성취"라고 이야기하는 '노계가(盧溪歌)'는 자그마치 일흔여섯에 지은 것이다.
16세기 중후반에 태어나 17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그는 당시로선 드물게 여든두 살까지 장수하기도 했다.
자, 이제 '그'의 이름을 밝힐 때가 됐다. 본관은 밀양,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 바로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 박인로(朴仁老·1561~1642)다.
아직도 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아래 시조를 읽어보자. 중·고교 시절을 지나온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법한 '조홍시가(早紅枾歌)'의 첫머리다.
한음 이덕형으로부터 조홍감(다른 감보다 일찍 익는 홍시)을 선물 받고는 그걸 가져다줘도 반길 부모가 돌아가시고 없음을 서러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은 즉 하다마는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