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이방인카뮈의 이방인에 대해 저자는 기존의 권위있는 번역자에 대항(?)하여 자신만의 논거를 들며 그 미묘한 번역의 오류를 비판하고 있다. 그 옳고 그름은 이 책을 통해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이의성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역시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편'이다. 절제된 문장 속에 숨어있는 거대한 수수께끼를 손 더듬어가며 찾아가는 재미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읽은 뒤에 물 밀듯 밀려오는 사색과 성찰의 시간이 좋기도 하다가도 다시 읽을라치면 손이 잘 가지않는, 그런 책이다. 그런 <이방인>을 다시 읽게 된 연유는 책을 엮은이가 당당하게 내놓은 문구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소설 <이방인>이 가진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 구조 상, 다르면 얼마나 다르다고 이런 과격한 문구를 삽입했을까, 중소 출판사에서 으레 써먹는 자극적인 홍보의 일환인가 싶어 눈쌀이 찌푸려지다가도 문득 궁금해진다. 책 띠지에 넣은 문구를 책에선 어떻게 수습했을까, 얼마나 그럴싸하게 포장했을까에 대해 말이다. 길에 이어져온 전통에 흠집 내기를 시도함으로써 존재의 당위성을 찾는 건 그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갖느냐에 따라 갈리게 마련이다. 애시당초 그런 게 있을리 만무하다는 전제를 깔고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 카뮈는 지금으로 치면 4차원적인 인간으로 평가될 수 있는 주인공 '뫼르소'를 통해 카뮈는 우리 안의 부조리를 고발하고자 했다. 불합리한 세상과 이에 맞서는 인간의 합리, 애시당초부터 우리 안의 부조리는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 로 대표되는 그의 철학은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이방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유일한 방법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에게 '죽음'을 앞둔 상황이야말로 그의 '존재 가치'를 극명히 인식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던 듯 싶다.
엄마가 죽었는데 울어야 할지, 울지 않아도 될지, 마리와 결혼을 해도 되고 안해도 그만인 부조리 가득한 세상 속에서 그 자신이 종일 찾고 있던 생의 의미를 죽기 전 비로소 깨달았으니, 이만하면 행복한 삶이라고 해야할지, 비극적인 삶이라고 해야할지. 왠지 소설 속 뫼르소가 어디선가 중얼댈 것만 같다. '어느쪽이든 아무렴 어떤가.'라고 말이다.
책의 이야기 구조는 간단하다 못해 단순하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낯선 이방인 같은 주인공 뫼르소, 그리고 그가 죽음에 이르는 길지 않은 여정 속에서 느낀 심경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다. 문제는 서두에 밝혔던 바, 그간의 번역들 상에서 발견된 오역에 대한 부분이다. 혹자는 여전히 '해석의 차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바로 그 부분 말이다.
나 역시 몇 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당시와 비교했을 때 이번 <이방인>을 읽으며 뭔가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소설 특유의 난해함이라 치부하며 넘어갔던 몇 가지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 난해함이 상당부분 해소됐다. 그야말로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몇 년 간에 걸친 나의 지적성장이 일구어 낸 쾌거라고 봐야할까? 그러나 책에서 절반이 넘게 차지하고 있는 (논문에 가까운) 역자의 번역 노트를 보며 나의 지적인 성장이 아닌, 누군가의 치열한 사투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이름난 학자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