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로 쓰던 책들
최시은
진실을 외치자 표정을 바꾼 학교 성균관대학교에서 12년을 근무한 남씨는 2014년에 문화융합대학원을 설립했다. 직급도 초빙교수에서 대우 전임교수로 올랐다. 남씨는 정교수와 똑같은 권한으로 전반적인 학사운영을 책임졌다.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불행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문화융합대학원 원장으로 A교수가 부임한 것이다. 2014년 4월, 대학원 설립 이후 학생들과 함께 하는 첫 MT 날이었다. 야외 바베큐를 하며 저녁을 먹고 있었다. A교수는 남씨와 신체 접촉을 시도했다. 자리를 옮겨도 소용없었다. A교수는 끈질기게 그녀를 쫓아왔다. 첫 엠티를 망치고 싶지 않아 꾹꾹 참았다. 그러다 A교수가 남씨의 손등을 꼬집자 자신도 모르게 그의 팔을 쳐냈다.
"선생님 왜 이러세요!"남씨는 3년 전과 똑같은 말을 외쳤다. 그러자 A교수는 "남 교수는 내 살을 싫어해?"라고 되물었다. 남씨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혹시나 학생들이 둘의 관계를 오해하진 않을까 걱정됐다. 남씨가 공황상태에 빠져 있을 때, A교수는 쐐기를 박았다.
"오늘은 남 선생님과 잘 거니까 우리 둘 잘 방을 따로 잡아놔라" (서울중앙지방법원 2018.1.30 선고 판결문 발췌)그 자리에 있던 다른 여성 교수도 A교수에게 똑같이 성희롱을 당했다. 같은 해 11월 MT에서는 대학원 학생에게 성희롱을 했다. 술자리에서 농담으로 폭탄주 제조 자격증이 있다고 말한 여성 학생에게 그는 "술은 여자가 따라야 맛있지", "(소맥 자격증이 있다는 학생에게) 술집 여자 자격증이다"라며 희롱했다.
해가 넘어가고 2015년 2월, 두 학생이 익명으로 A교수의 성희롱 및 성추행을 고발하는 탄원서를 성균관대학교 성평등상담실에 투서했다. 그 탄원서 안에는 남씨 본인과 동료 교수 B, 학생의 피해 사실이 들어있었다. 2011년과 달리 이번 일은 혼자만의 문제로 넘어갈 수 없었다. 정교수가 되는 길이 눈앞에 보였고, 고민이 있었지만 이런 대학의 교수로는 남고 싶지 않았다. 남씨는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싸우기로 결심했다.
고발 당일 성균관대학교 교무처로 사건이 넘어갔다. 교무처 팀장은 탄원서 속 동료 교수 B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탄원서에 교수들의 실명이 들어갔으니 피해 사실에 대한 경위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팀장이 경위서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고 적는 게 어떠냐'고 권하고, '일단 탄원서에 피해자로 교수 이름이 적혀 있는 것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는 게 B교수의 설명이었다. B교수는 남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러한 내용을 전했다.
"(교무처) 팀장은 (우리 둘이) 그냥 기분은 언짢았지만, (A교수의 성추행에) 수치심은 느끼지 않았다고 좀 해서, 여기서 일단 (우리) 이름을 빼는 게 좋겠다는 거야." (2015년 2월 23일 남씨-B교수 통화 녹취록)그 이후로도 학교는 계속해서 B교수에게 남씨를 설득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회유는 통하지 않았다.
B교수 : '남 교수를 잘 저걸(설득) 해달라'고 그랬거든.
남씨 : 선생님 지금. 피해자가 무슨, 같은 피해자를 뭘 설득을 하고…. 그게 말이 되냐고? 학교 측에서.(2015년 3월 4일 남씨-B교수 통화 녹취록)도리어 피해자인 남씨가 궁지에 몰렸다. 또 다른 동료 교수는 남씨에게 전화를 걸어 A교수가 한 말과 본부 측의 입장을 전했다. A교수가 자신과 통화에서 "본부나 이런 데서 '이거는 남정숙 선생 장난이다' 생각한다"고 말했다는 것. 또 해당 교수는 "가만히 있으면, 그냥 지나간다는 것"이란 게 부총장 측 입장이라며, "본부에서는 부총장 포함해서 이걸 덮으려고 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사건을 투고한 두 학생의 의도까지 의심받는 듯했다. 3월 3일 교무처와 직접 만난 남씨는 되레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피해자로 지목된 교수들이 학생들을 이용해 익명으로 고발하게 만든 것 아니냐는 의미였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생각하면, 학생을 이용해서, 두 사람이 이용을 하겠다 그런 이야기로 오해를 받을 수가 있단 말이죠." (2015년 3월 3일 남씨-교무처 대화 녹취록)남씨는 해당 발언이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교무처가 "가해자 A교수가 한 이야기"라는 식으로 해명했다는 게 남씨의 설명이다.
'피해자 보호'는 어디에도 없었다같은 해 3월 중순 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위원은 학생처장, 교무처장, 교원인사팀장, 가해 교수가 소속된 대학 학장 등이었다. 남씨는 조사위원회의 객관성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끝까지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조사위원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각각 조사하고 사건을 목격했던 학생의 증언도 확보했다. 그런데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질 신문'을 추가로 요구했다.
교원인사팀 과장 :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 확인 작업이 들어가야 하는데, A교수가 말씀하시는 거하고 상반되는 게 있다." (2015년 5월 18일 남씨-교원인사팀 과장 통화 녹취록) 성균관대학교 성폭력 예방 및 처리에 관한 내규 제 4조 (피해자 보호 및 비밀유지의 의무)
①성폭력 사건의 조사·처리 과정에서 피해자 보호가 1차적 중요성을 갖는다.
②가해자로 신고된 자는 성폭력 사건이 신고되었음을 알았을 때부터 피해자와 어떤 방식으로든 접촉을 해서는 안 된다. 조사위원회에서 가해자가 소속된 대학 학장과 학생처장은 화해를 요구하는 듯한 발언도 했다.
단과대 학장 : 우리 다, 두 분(A교수와 남 교수)이 더 이렇게 해서 더 많이 잃지 않게 좀 더 여기서 잘했으면 좋겠어요. (2015년 3월 27일 3차 조사위원회 녹취록)학생처장 : 남 교수님께서도 마음을 좀 해서, 다시 한번 손잡고 좋은 쪽으로 나가는 게 어떠냐 그런 거를 생각한 거죠. (2015년 3월 27일 3차 조사위원회 녹취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