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 와중의 피난민 행열(출처: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142쪽박도 편집,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2009, 눈빛) 의 142쪽에 실린 피난민 사진
김병하
이듬해 늦봄 어느 날 아버지와 형님들이 낙동강 건너에 땅콩 심으로 가는데 나도 따라가고 싶어 강가에까지 갔다가 집으로 가라고 일러 그냥 혼자 투덜투덜 되돌아 왔다. 집에서 혼자 심심하던 차에 건너 방에서 작은 쇠붙이를 가지고 놀다가 그만 폭발하여 혼절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마당에서 뽕잎을 따고 있다가 놀라 방안에 와보니 내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단다.
그때 폭발물 사고로 나는 오른 손가락 세 개를 다쳐 절단했으나, 요행히 연필을 쥐고 글씨를 쓸 수는 있었다. 오른손을 다쳤지만 그 손으로 글씨를 쓸 수 있었다는 게 평생 내게는 얼마나 다행이었지 모른다. 40년 교단생활에서 그나마 오른 손으로 분필을 쥘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 나는 두 차례나 온몸으로 전쟁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하여 6.25는 평생 내게 "어찌 그날을 잊으랴!"이다.
1952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책걸상도 없는 마루에서 그냥 한글과 숫자를 익혔다. 따뜻한 날에는 나무 밑에서 수업을 했다. 식목일에는 어김없이 강변에 나무를 심었고, 늦가을에는 교실 난로에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 3학년이 되어서야 책걸상이 있는 교실에서 수업을 했다. 그리고 이 무렵 간식으로 미국에서 보내온 분유를 끓여 먹고 설사하기가 다반사였다. 4학년 때부터 도시락을 싸오기도 했지만, 아예 점심을 굶는 아이들도 있었다.
당시는 초등학교에도 월사금이라는 게 있어서 제때에 내지 못하면 학교에서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학생들은 겨우 절반 정도 중학교에 진학하고 여학생들은 3분의 2 이상이 초등학교가 최종학력이었다. 나는 집에서 약 6km 떨어진 구미중학에 들어가, 들길로 다니면서 영어단어를 외우곤 했다.
중2때 부산 큰형님이 자전거를 사주어 그때부터는 자전거로 신나게 통학을 했다. 여학생들 가방도 실어주고, 어떨 때는 초등 6년 동안 함께 공부한 여학생들을 앞뒤로 함께 태워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게 내게는 참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들도 지금은 나처럼 늙어가고 있을 터.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4.19혁명이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을 신격화하던 분위기를 대충 감지하긴 했지만, 4.19 학생의거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1961년에 나는 고향을 떠나 큰형님이 계시는 부산 동래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이때부터 나는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때부터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문턱에 들어서게 된 게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적만 해도 우리나라는 몹시 가난했다. 그때만 해도 북한이 우리보다 더 잘 살던 시대였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 감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무렵 나는 사회변동보다는 내 자신의 진로와 정체성 문제로 갈팡질팡하는 애송이 학생에 불과했다.
고2때부터 나는 막연히 인생문제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철학과 쪽에 관심이 쏠려 부산 형님 집을 떠나 서울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서울생활은 내게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감당하기 어려운 난제더미였다. 그 이래로 서울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내게 각인되었다.
그 서울생활을 접고 나는 대구에 내려와 이듬해에 대구에서 특수교육 공부를 새로 시작했다. 이때 서울서 일 년간의 정신적 방황이 내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때는 그냥 모든 게(삶 자체가) 고통(苦)이었다. 대구에서 새로 시작한 '특수교육'이 나를 살려주는 길이 되었다. 한 차례 청년기 홍역을 호되게 치른 셈이다.
그때 내가 왜 특수교육을 택했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냥 철학의 연장에서 남이 하지 않는 걸 해보고자 했을 뿐이다. 그게 인연이 되어 나는 평생을 특수교육학 교수(1972-2012) 노릇하면서 살아왔다.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일수록 선택의 갈림은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70년대는 우리나라가 고도성장을 질주하던 때다. 그에 편승했음인지 나도 대학원에서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이듬해 1972년 9월에 모교인 대구대 특수교육과에 전임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모처럼 안정감을 회복하여 1973년 4월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해 신접살림을 차렸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위궤양이 심해서 나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결혼 후 생활에 안정을 찾아가자, 자연히 위장병도 나았다. 건강에는 심리적․정신적 안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내가 처음에 대학에서 특수교육을 가르칠 때만 해도 개론서 외에는 우리나라에 전문도서가 전무한 상태였다. 그때 나는 특수교육사를 강의하면서 틈나는 대로 자료를 정리하여 <특수교육의 역사적 이해>(1977)라는 책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교수로서 겨우 제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연말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특수교육진흥법'이라는 게 제정되어, 국민소득 2천불 시대에 장애아동교육도 일차적으로 국가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걸 천명했다.
1978년 3월부터 약 6개월간 나는 당시 한국사회사업대학 이태영(李泰榮; 1928-1995) 학장의 특별한 배려로 캘리포니아 풀러톤에서 특수교육을 연수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이때 미국은 '모든 장애아동을 위한 교육법'(Education for All Handicapped Children Act/PL94-142)을 제정하고, 그 실행을 서둘고 있던 참이었다. 특수교육에서 조용한 혁명이 연방정부 차원에서 크게 일기 시작한 게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훈풍에 편승하여 나는 미국에서 특수교육의 새로운 동향과 그 실천과제를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교수로서 한층 성장하는 데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때 국내정치는 유신시대의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지만, 나는 그냥 내 앞가림하기 급급했다. 10.26 사태로 유신독재는 그 막을 내리는가 했으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이듬해 5월 이른바 광주항쟁으로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렸다. 그리고 광주민주항쟁은 그냥 광주폭동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이 무렵 나는 개인적으로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81년 8월에 나는 1년간 가족과 함께 워싱턴, DC의 갤러뎃(Gallaudet)대학에 객원연구교수로 머무는 기회를 가졌다.
미국에 있으면서 비로소 국내 광주민주항쟁의 실상을 어느 정도 듣고 알게 되면서, 그간 내가 얼마나 태평스러웠던가를 알게 되었다. 내면적으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외면적으로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생활에 적응하고 즐기는 데에 여전히 맛을 들이고 있었다. 갤러뎃 대학은 세계적으로 유일한 농(deaf)특성화 국립대학(1864년 설립)으로, 내게는 특수교육전공과 관련해 미국의 농교육 전통과 농문화의 실상을 접하는 데에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풍부한 농교육 자료들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도 내게는 큰 보람이었다.
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늦게나마 나는 민주화와 분단극복 문제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 했다. 이 땅의 지식인이면 마땅히 가져야 할 문제의식에 나름 자극을 받기 시작한 게다. 그러나 나는 그 실천면에서는 여전히 소극적인 사람이었다. 이 무렵 나는 <대구사회문제연구소>에 창립이사로 참여하고, 한겨레신문 창간 시민소액 주주로도 참여하였다. 하지만 그 참여 수준은 그냥 고만고만한 정도였다. 어쨌거나 한겨레신문은 창간 이래로 지금까지 나의 단골구독지가 되었다. 유일한 종이신문으로 '한겨레'는 평생 내 동반자가 될 게다. 그리고 교양잡지로 <녹색평론>도 창간 이래로 계속 구독하면서, 정년 후에는 가끔 투고도 한다.
나는 평소에 광복이후 한국교육의 역사적 과제로 학생들에게 교육의 인간화와 민주화, 그리고 통일지향교육을 말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이 세 가지 역사적 과제에 담론적․실천적 수준에서 어떤 보탬을 했는지 별로 내세울 만한 게 없다. 말하자면 머리로 생각만 했지, 가슴으로 혹은 몸으로 실천하는 데에는 소극적인 사람이었다. 생각이 철저하면 행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나는 대부분 그러질 못하는 삶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설정한 삶의 형식에서 이탈하는 걸 경계하는 기본적인 노력은 나름대로 하고자했다.
80년대의 경제적 고도성장에 이어 90년대에는 대통령직선제 도입이후 민주화도 점차 안정 기조를 찾아가는 듯 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나는 장애인 문제 중심으로 나름의 사회참여 기회를 가지기 시작했다. 먼저 대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이헌규 선생의 요청에 응하여 소장과 이사장직을 맡아 참여의 길을 열었다.
그 후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질라라비장애인야학 교장을 맡아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기회를 가졌고, 이 무렵 대구장애인연맹이 결성되어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당시 장애인계에서는 이른바 '장애인당사자 중심주의' 목소리가 제기되는 한편, 장애학(Disability Studties) 담론이 의제화 되기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참여활동을 통해 나는 전통적인 특수교육의 학문적 틀을 벗어나 장애인문제를 당사자 입장에서 다시 보는 관점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책상머리에서 얻은 간접지식이 아니라 참여를 통한 지적 안목을 가질 수 있었던 게 내게는 큰 소득이자 공부였다. 말하자면 사회참여를 통해 장애인 문제의 현실을 체감하는 창구를 내 나름 가질 수 있었던 게다. 이런 것들이 내게는 소중한 학습기회가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장애인단체로부터 늘 어른 대접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가 현직에서 나의 전성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1997년에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당했지만, 그 위기를 용케 잘 넘기고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냉전에서 평화공존에로의 길을 여는 데에 기여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과 6.15 선언은 그런 정책기조 끝에 얻은 결실이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방문은 평화공존을 기조로 경제적 협력의 길을 터놓는 데에 기여했다.
금강산관광에 이어 개성공단은 그 중요 성과였다. 하지만 그 후 보수정권 10년 동안 그동안 쌓은 모처럼의 성과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고, 이 땅에 다시 냉전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통일은 대박'이라니 그게 대통령이 할 소리인가. 그 말 자체가 공공연히 흡수통일의 자만에 빠져버린 증거다.
이런 와중에 나는 2012년 8월 말에 40년 교수노릇을 접고 정년을 맞이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광복 1세대로 태어나 농업사회-산업사회-탈산업사회를 내 당대에 모두 체험했다. 한국형 압축발전의 덕분에 나는 유럽인의 300년 세월과 미국인의 200년 세월에 버금가는 변화를 내 당대에 모두 겪은 셈이다.
정년에 앞서 나는 마지막으로 <한국특수교육론>(2011)을 마음먹고 정리했다. 이것은 한국특수교육학의 정체성 정립을 위한 내 나름의 야심찬 시도였다. 이에 앞서 나는 세계 속의 지역학으로 <대구특수교육사>(2007)을 내 놓았다. 왜냐하면 대구는 광복 후 한국특수교육의 메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