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5년만에 터전을 마련하고 지은 집, 뒤로 느티나무가 보인다.
최현지
경제신문사 출판부에서 팀장으로 마흔의 나이를 맞은 그는 살아온 사십년처럼 남은 시간을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크게 다가왔다. 사람처럼 살다가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의식주를 내 손으로 조금이라도 해보자. 먹을거리는 농사를 지으면 될 것이고, 옷은 한복집을 하는 아내가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렇게 시작된 귀농의 꿈.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고,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귀농학교에서 농사의 가치관과 생태적인 삶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고급 자동차를 갖고 싶은 자본주의 경제 개념이 무너져 버렸다.
특히, 강수돌 교수의 '풍요로운 삶은 부(富)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눠줄 때 풍요로운 것이다'라는, 지금 생각하면 평범하고 단순한 이야기지만 그 당시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 후로 하루라도 빨리 서울을 벗어나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을 의미있게 살아보고 싶었다. 곧바로 사표를 냈고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고향이 농촌으로 가난하게 살면서 농사를 겪어본 아내는 매일 울면서 만류했고 가정이 파탄날 것 같았다. 회사를 찾아가서 일주일 만에 사표를 돌려받았지만 마음이 떠나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다시 몇 개월을 다녔지만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회사에 미안했고 귀농해서 함께 살자고 했던 가까운 친구가 갑자기 죽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과 공포와 대상포진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아내가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절충안을 냈다."
농사실습생으로 시작된 귀농아내는 서울에서 2시간 거리의 지역으로 혼자 귀농하고 집에는 매달 생활비를 보낼 것을 요구했다. 마침, 괴산에서 유기농업을 하는 흙살림법인에서 농사실습생을 모집한다는 것을 알고 아내와 함께 내려가서 결정을 하고 회사에 다시 사표를 냈다. 아내는 몇 개월 못 버티고 올라올 것으로 생각했다.
숙소를 제공받고 월급 50만 원을 받으며 농사 선배와 함께 고추 농사를 처음으로 했다. 농사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들은 모든 것이 다 신기했고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한 달에 한 번 집에 다녀갔는데 몇 달이 지날 때쯤 초등학교에 다니던 5학년, 1학년 아들이 아빠랑 같이 살자고 졸라서 아내도 결심을 했다.
아파트를 팔고 충북 음성에 텃밭이 있는 집을 월세 20만 원에 계약했다. 싸게 빌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시에서 느끼는 것과 달리 농촌에서 20만 원은 큰 돈이라는 것을 살면서 알았다. 온 가족이 함께 살게 된 음성에서의 3년은 정착을 못하고 헤매는 삶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아이들은 쉽게 농촌살이에 적응하고 재미있어 했지만 아내가 힘들어했다. 농사 경험은 있어서 작물을 키우는 것에는 재미를 붙였지만, 주말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주말이면 일부러 서울로 올라가거나 영화를 보러 시내로 나가는 일도 많았다.
그렇게 손님을 맞이하는 일에 지치고 몸도 안 좋아지는 3년쯤 아내가 시골살이에 대한 느낌을 일간신문에 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활력을 찾았다. 마침 알고 있던 출판사에서 <시골에 사는 즐거움>으로 책을 냈고 출판기념회도 열어주었다. 당시의 일은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쓰기도 했다(관련기사 :
철없는 농사꾼 아내가 책을 냈습니다).
책을 낸 이후로 아내는 농촌살이에 적응을 했고, 3년의 시간을 보낸 후에 부부는 제대로 된 농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농사실습생에서 벗어나 첫 농사로 밭 2500평을 주변의 도움으로 얻었다. 주작물로 고추를 심고 귀농한 여러 사람들이 보내준 토종씨앗 수십 가지를 심었다. 토종오이를 심고서는 생각지도 못하게 많이 열리는 것을 다 따지도 못하고 노각이 되어 떨어진 것을 주우며 울기도 했다.
첫 농사에서는 다양한 작물을 심어서 사람들과 나눔을 했고, 고추농사에서 얻은 300만 원이 그 해 수입이었다. 다음해에는 500만 원 그 다음 해에는 800만 원으로 수입이 조금씩 늘어갔고 농사경험이 쌓이면서 작물에 대한 관리 방법과 실력도 조금씩 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