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연인들. 하코다테항에서.
이동규
쿨하게 한걸음 진화한 문화요즘 유행어로 '썸'이라는 것이 생겼다. '생겼다'고 느낀다는 점에서 이미 내가 속칭 '아재'가 됐음을 느낀다. 사실 내가 한창 연애 적령기였던 시절에는 썸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그때에는 사귄다와 안 사귄다(라고 쓰고 못 사귄다고 읽는다)의 경계가 상대적으로 뚜렷했다.
그 중간 단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해봤자 '잘해보려고 연락하는 사이'처럼, 길고 구차한 표현 정도였다. 썸처럼 한 글자라서 발음도 편하고 정확하게 명사화된 용어에 비해 우리 세대의 그것은 상당히 촌스러웠다. 난 그래서 요즘 젊은 세대들이 즐기는 썸 문화가 한편으로는 부럽다.
항간에는 썸에 대해 부정적인 평을 하는 글이나 말들도 많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지 못한 태도라는 둥, 피상적인 관계를 추구한다는 둥, 타인에게 의무와 부담을 떠넘기는 수동적인 자세라는 둥, 시쳇말로 간 보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둥, 썸을 즐기는 요즘의 연애 세태를 우려하는 견해들이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견해로서 뭐 그리 비평적일 필요가 있을까 싶다. 솔직히 대상 사이에서 서로 사랑을 느낀다고 확신할 수 있는 순간이나 지점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마치 해안가에 앉아서 파도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를 헤아리는 것만큼이나 난해하다. 그러나 썸이라는 단어는 그 같이 시원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감정과 그 파장들의 속성을 묘하게 잘 반영하고 있다.
게다가 썸이라는 용어가 우월한 까닭 중 또 하나는 그 단어가 인간이 이성에게 갖는 호감에 관하여 책임과 의지를 따져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세대에 즐겨 썼던 표현, '잘해보려 연락하는 사이'에는 '내'가 상대와 잘해보려 한다는 의지와 목적의식이 또렷이 드러난다. 그리고 의지와 목적이 뚜렷해진 이상 호감이라는 감정에 방향성이 생긴다.
둘 사이에 호감이 생기면 그 호감을 어떤 식으로든 표출하여 확실한 결말을 그려내야만 하는 걸까? 사랑이라는 회화의 세계에서는 그리다 만 미완의 그림들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걸까? 물론 상대에 대해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구애한다는 점은 분명 칭찬받아야 마땅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