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6.10남북학생회담을 위해 판문점으로 향하려던 대학생 5천여 명이 홍제동 지하철역 앞 6차선 도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중 가스차 4대가 다가오자 팔짱을 끼고 드러누워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고 있다. 경찰은 다연발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켰다. (아래)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임진각까지 당도한 학생들이 누워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청련동지회
"88서울올림픽을 남북공동 주최로" 대학생들의 이러한 통일운동은 정치권에도 적지 않은 충격파를 던졌다. 우선 제1야당인 평민당 총재 김대중은 "정부가 남북학생회담을 주선할 것"을 요구하며 학생들의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김영삼의 민주당도 동조했다.
무엇보다도 집권 민정당과 노태우 정부도 학생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다만 '학생들의 남북 교류 주장을 받아들이지만, 대화 창구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하는 처신을 택했다.
이는 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의 참가를 독려하며 이른바 '북방외교'를 펼치던 정부로서의 고육책이기도 했다. 앞서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당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빌미로 미국 등 서방이 불참하고, 84년 LA올림픽은 그에 대한 소련의 보복으로 동구권이 불참하는 반쪽 올림픽에 그쳤었다. 그래서 88년 서울 올림픽 성공에 대한 기대는 더욱 깊었다. 심지어 노태우 대통령은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약칭 7.7선언)을 발표할 정도였다.
한편 재야 쪽에서는 민통련의 문익환 의장이 통일 문제를 가장 선도적으로 치고 나왔다. 민통련은 이미 2월에 문 의장의 주창에 따라 '통일위원회'(위원장 김병걸)를 구성하고 통일문제에 대해 대중강연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6.10남북학생회담'을 들고 나오자 이에 대해 발 빠르게 움직여 함석헌, 문익환, 계훈제 등 원로들의 지지선언을 이끌었다. 또 민통련을 비롯한 재야단체 68개가 연대하여 '조국통일의 대업을 앞당기기 위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물론 여기에는 민청련도 참여했다.
NL과 거리 둔 민청련 지도부그런데 민청련의 남북학생회담 지지 열기는 학생들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이는 민청련 지도부가 NL계열 학생운동에 대해 지지하지 않은 것과는 별도로, 남북공동올림픽이라는 운동 슬로건에 대해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성환 의장을 비롯한 민청련 지도부는 4.26총선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조성되고, 특히 광주에 기반을 둔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된 정세 아래에서는 무엇보다도 광주항쟁의 진실을 밝혀내는 투쟁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심지어 이런 시기에 통일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투쟁 역량을 분산시키고 전열을 흐트러트릴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광주 문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당장 다가온 올림픽 이슈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양심수 문제라든지 민중생존권 문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강했다. 그래서 광주를 투쟁의 1순위에 놓더라고 적어도 통일 문제가 그 다음 순서는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