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香白里 人香萬里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고,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 사람의 향기는 정신적 가치가 흐르고 넘쳐서 문학과 예술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는 그 정점에 핀 꽃과 같다.
이명수
'시인'하면 뇌리를 스쳐 가는 영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단순한 주입식 교육으로 메말라 가는 학생들에게 인간애와 자유를 심어 주는 '키팅' 선생의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꽤 오래전에 본 영화인데도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대사와 몇몇 장면은 기억에 남아 있다. 제목에 이 영화의 주된 관점이 담겨 있는데, 주요 등장인물들의 비밀 조직 이름이기도 하고, 현실 사회를 비판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웰든 아카데미는 미국의 8개 명문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강압적인 교육 방식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명문고이다. 입학식 날 '존 키팅'이라는 국어 선생이 새로 부임한다. 그는 처음부터 엉뚱한 수업 스타일로 학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시(詩)를 공부하는 시간에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시를 알기 위해서는 운율, 음조, 비유를 먼저 따져 봐야 한다는 '시 원론'을 읽게 한다. 칠판에 그래프를 그려가며 좀 정상적으로 설명하는가 싶더니 싹싹 지워버리고 "쓰레기!"라고 외친다. 키팅 선생의 이어지는 대사에 영화의 메시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를 측정하려는 이 책의 페이지를 찢어 버려. 어서 찢어 버려. 시는 단지 아름다워서 읽고 쓰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이란다.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너희들 또한 한 편의 시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시를 써야 한다. 시를 분석하고 측정하라는 그 페이지를 찢어 버려라."선생님의 외침에 학생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린다. 용기 있는 몇몇이 북북 페이지를 찢어 버리고, 그제야 다른 학생들이 따라서 행동한다. 키팅 선생은 참교육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주며 영혼의 촛불에 심지를 돋워준다. 영화에서는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눈앞의 기회를 놓치지 마라, 현재를 즐겨라!'로 해석되는 라틴말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었다.
삶의 유지에 필요한 수단들이 삶의 목적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사회가 바로 '죽은 시인의 사회'이다. 황금만능주의가 인간 사회에 소중한 가치들을 많이 집어삼켜 버렸다. 야망과 욕망만 충만할 뿐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희박하다. 시인이 죽든 소설가가 죽든 상관하지 말고 나만 잘살면 되고, 경쟁에서 뒤처지면 패배자가 되니까 학생 때는 고생스럽더라도 꾹 참고 공부만 하라고 끝없이 주입하고 강요한다. 그리하여 적자생존, 승자독식 등 시장 지상주의에 충성스러운 부속품이 된 냉혹한 이기주의자들이 꾸역꾸역 양산되는 것이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영화 속에 나오는 웰든 아카데미 같은 풍조다. 부모가 주입시킨 꿈이 자신들의 꿈으로 둔갑해 있고, 무조건 좋은 대학, 연봉이 높은 직업을 얻고 더 좋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피 터지게 경쟁하는 구조이다.
백년대계라는 공교육이 경쟁으로만 몰아붙이다 보니, 세상을 평화롭고 따뜻하게 하는 인성교육이 설 자리를 잃고 사람 됨됨이를 가르치는 전인교육은 케케묵은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극심한 생존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인식만 불어넣다 보니 갖가지 반칙이 난무하고, 올바른 가치관이 뒤죽박죽되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조차 경계가 희미해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시가 없다면 경쟁도 중요하지만 공동체 의식은 더 중요하다. 우리나라 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民主)'와 더불어 산다는 '공화(共和)'를 지엄한 가치로 명문화했다. 화(和)라는 것이 벼화(禾)에 입구(口)가 합쳐진 것이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의미를 연장할 수 있는데,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생겨나는 것이 공동체 의식이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존재할 수 없다. 무인도에서 자급자족으로 혼자 살아간다면 모를까 사회 속에서 살아가려면 반드시 다른 사람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사 모든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도 모두 그 속에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을 연구하는 인문학이 교육의 근간이 되어 '사람의 길'부터 가르쳤다. 전통시대 때 유교 지식인의 필독서였던 사서삼경 중 제일 먼저 배워야 했던 <대학>은 동양의 인문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대학'은 '대인지학(大人之學)', 즉 '큰 사람이 되기 위한 학문'을 줄인 말로 오늘날의 '대학교'라는 명칭이 비롯되었다.
<대학>에서는 유학의 큰 틀을 제시하고 있는데,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순서를 8조목으로 명징하게 정리했다.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가 바로 그것이다.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사물의 본질을 꿰뚫은 후에야 알게 되고, 바르게 알아야 뜻이 성실해지고, 뜻이 성실해져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되어야 몸이 닦이고, 몸이 닦아져야 집안이 바로잡혀지고, 집안이 바로잡혀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져야 천하가 편안해진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순서와 과정이 학문의 금과옥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기술과 능률, 눈에 보이는 성과 등 실용을 중시하면서 인문학적 가치가 뒷전으로 쑥 밀렸다.
인문학적 소양이 충분하지 못할 때 인성은 피폐해지고, 윤리의식은 사라지며,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배금사상의 노예가 된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는 과학기술이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해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적지 않은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 수많은 생명을 순식간에 몰살시킬 수 있는 핵무기 등이 국제 평화를 위협하고 있으며, 무분별한 개발로 말미암아 자연과 생태계 환경이 속절없이 파괴되고 있다. 우리가 사는 터전이 대책 없이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인륜 도덕은 과학 기술적 지식보다 훨씬 더 우월한 가치다. 사람의 도리와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인문학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 사는 사회에 따뜻한 인간애가 깃들게 하자는 뜻이다. 첨단의 끝을 달리는 어떠한 기술이 발명되더라도 그 기술을 다루는 사람에게 인문학적 소양이 없다면 미치광이에게 칼을 쥐여준 격으로 치명적인 무기로 악용될 수도 있다.
세상에는 꼭 필요한 것이 있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도 있다. 공기, 물, 불, 식량 등은 생존에 절대 필요하다. 없으면 생명이 살아갈 수 없다. 자동차, 휴대전화, 텔레비전, 라디오, 냉장고 등 문명의 이기(利器)는 없으면 많이 불편하겠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시는 어떨까? 안도현 시인은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라고 노래했다. 철 따라 피어나는 갖가지 꽃들을 몰라도 사는 데 별 지장은 없다. 사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이지만, 알면 그만큼 삶의 질이 풍부해진다. 시 또한 그렇다.
알아도 몰라도 그만이 것이 어디 꽃과 시뿐이랴! 지저귀는 새소리를 안 들어도 살 수 있고, 문학과 예술을 몰라도 사는 데는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하고 재미없을 것인가!
철저히 실용적인 관점에서 인문학을 바라보면 뜬구름 잡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속물주의자들에게는 인문학적 가치가 '빌어먹기 딱 좋은 바보짓'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사람은 자기 배만 부르면 그만인 짐승이 아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산다면 짐승과 다를 게 무엇이 있겠는가? 뭇짐승과 차별이 되는 것은 정신적 가치를 알며, 그것을 행동으로 발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약하고 가련한 존재를 보면 그냥 빼앗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심, 즉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인문학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