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체제에서 법원행정처가 대법원 판결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29일 오전 KTX 해고 승무원들이 김명수 대법원장 면담을 요청하며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 진입해 농성을 하고 있다. 이들은 대법원 대법정까지 진입후 대법원 관계자들의 설득으로 다시 법정 앞으로 나와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2018.5.29
최윤석
다시 이번 사태로 돌아와보자. 양 전 대법원장을 포함한 사법농단 관계자들도 충분히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특조단 보고서에는 "인사 불이익 부과 방안 문건을 작성·검토한 인사심의관 등은 '문건의 성격상 인사총괄심의관실 소관 업무가 아님에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시해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윗선 지시로 부당한 문건을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재판거래' 문건이 실행됐다는 정황도 있다.
"재판장의 잠정적 심증 확인." 법원행정처가 2015년 9월 15일 작성한 '통진당 비례대표 지방의원 행정소송 예상 및 파장 분석' 문건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시 행정처는 2015년 하반기 국정감사를 앞두고 있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국정감사를 상고법원을 입법할 기회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특조단 조사에서 담당사건 재판장은 "연수원 동기인 심의관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국정감사와 관련해 선고를 연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응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먼저 얘기하게 됐다"고 말했다.
원래 선고 일은 다음 날인 16일이었지만, 그해 11월 25일로 연기됐다.
의원직을 박탈당한 통진당 국회의원들의 행정소송도 마찬가지다. 2016년 6월 8일 행정처는 '통진당 사건 전합 회부에 관한 의견' 문건엔 해당 소송을 전원합의체로 회부했을 때 "득보다 실이 많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실제 이 사건은 전원합의체에 회부되지 않았고, 대법원은 3년째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법조 관계자는 "직권남용이 쉬운 죄는 아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명시적인 거부가 필요한 건 아니다"라며 "시킬 때 목적이 뭔지, 절차가 지켜졌는지가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제왕적 대법원장 시스템 아래서 판사들이 양 전 대법원장이 이런 생각을 가졌다는 걸 몰랐겠나"라며 "실제 작성한 판사들은 결코 자발적으로 문건을 작성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진짜 합리성"모든 이가 외면할 때 판사만은 피고인의 목소리를 들어줘야 한다."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정해진 법에 따라 누구도 억울하지 않게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무죄 추정을 원칙으로 하는 법관이 여론에 휘둘려 재판을 심리해선 안된다. 그런데 지금 그 재판들이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사법부가 재판을 '볼모'로 청와대와 거래를 시도하려고 한 정황이 밝혀졌다. 대법원은 해당 사건 피해자의 절박함을 외면한 채 판결을 흥정 수단으로 삼았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 KTX 승무원 해고 사건, 전교조 시국선언 사건 피해자들뿐 아니라 국민 대다수가 분노하고 있다. 재판에 대한 신뢰는 근본적으로 법원을 향한 국민의 신뢰에서 나오건만, 그 신뢰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도 사법농단 사태를 두고 일부 고위 법관들은 판사로서 '합리적인 의심'이 없다는 이유로 형사조치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세상 속에 갖혀있는 것 같다. 그들만의 세상이 아닌, 더 넓은 세상의 합리성은 이런 거다.
최소한 이번 사건에서만큼은 고위 법관들은 유무죄를 판단하는 법관이 아닌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됐을 수 있는 관계자의 위치에 가깝다고 보는 시각이 합리적이다. 또한 이 사건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이 없다고 말하는 고위 법관들의 의도 또는 판단력 또는 오만함에 대해 '뭔가 이상하다'고 의심해보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합리적이다. 덧붙여 합리성 운운 하는 일부 고위 법관들의 반응에 대해 그렇다면 대체 앞으로 사법부와 재판의 신뢰성을 어떻게 회복하려고 하는 것인지 혀를 끌끌 차며 걱정하는 반응이 합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