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대총선 결과 제1야당이 확정되자 평민당 당사에서 김대중이 축하인사를 받고 있다.
민청련동지회
승자 없는 승리?
민청련은 4.26 총선에 대해 '반민정당 투쟁'을 방침으로 삼았다. 비록 민청련 출신 중 일부가 평민당에 입당함으로써 일견 대선 때의 '김대중 비지' 노선을 버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공식적인 투쟁방침은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일 없이 반민정당 투쟁에 한정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평민당 입당파, 한겨레민주당, 민중의당 등 제도권 정치에 진입을 시도한 운동세력 어느 쪽에 대해서도 지지 여부를 표명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선거 결과는 민청련이 신경을 쓰이게 하는 것으로 나왔다.
우선 평민당에는 운동 세력 전반에서 가장 많이 입당했고 그만큼 많은 국회의원 당선자를 냈다. 민청련 출신은 아니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정상용, [꼬방동네 사람들]의 저자로 빈민운동가인 이철용, 시집 [겨울공화국]을 낸 저항시인 양성우 등이 국회에 입성했다. 민청련 출신으로 민통련에서 활동하던 이해찬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반면 87년 대선에서 '후단'의 입장을 견지했던 유인태, 제정구, 원혜영 등이 주축이 돼 창당한 한겨레민주당은 겨우 1석을 얻어 간신히 연명에 성공하는 성과밖에 거두지 못했다. 그 1석도 평민당이 후보를 내지 못하게 된 지역구에서 당선된 것이므로 사실상 전패와 다름없는 결과였다. 양김의 지역정치를 극복하고자 한 '후단'의 정치세력화는 실패했다.
87년 대선 때 백기완 선거대책본부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주축이 돼서 창당한 '민중의 당'은 노동자들이 밀집한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16개 지역구에 출마자를 냈다. 민청련 출신 진영효는 동대문구에서 출마했다. 그러나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고 출마한 지역구의 평균득표율은 겨우 4%에 그쳤다. 전국 득표율 0.3%로 법률에 의해 곧바로 정당 등록이 취소됐다. 그들이 주장한 '민중의 정치 진출'은 싹도 틔지 못하고 좌절됐다.
결국 운동권의 제도정치권 진출 시도에서 평민당 입당파만 성공한 셈이 됐다. 그리고 이는 민청련이 대선에 이어 김대중 비지를 계속 이어가는 것으로 비칠 수 있었다. 민청련 지도부는 이 점을 우려했다. 총선이라는 정치 일정에 상관없이 운동세력의 단결을 1차적 과제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청련은 총선의 파격적 결과가 발표된 뒤 곧바로 민청련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핵심 대목은 이러했다.
"우리는 이번 총선에서 평민당의 제1야당 부상을 지난 대통령 선거 시기의 '김대중 비판적지지'로 연결시켜 역사를 뒤로 돌리려는 무리한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아울러 한겨레민주당, 민중의 당 등 이번 총선에서 의도한 바 성과를 충분히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동지들에게도 '조소의 눈빛'을 보내는 것과 같은 소아병적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