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전 열사의 구두복원과정을 거치고 있는 구두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유가족 활동가로 산 30년
저는 동생을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의 옆에 묻으면서 약속을 했습니다.
"네가 바라던 세상이 올 때까지 네 몫까지 싸울게." 그리고 그날이 올 때까지 절대 울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한 번은 아버님이 약주 취하셔서 저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놈은 아주 독한 놈이야. 제 동생 죽었는데도 눈물 한 번 안 흘리잖아."
그랬습니다. 아버님의 그 말씀이 야속했지만, 약해져서는 동생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서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억지로 밀어 내리고는 했습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순간이 오면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피해서 담배 한 대 피어물고는 하늘을 바라보고는 했습니다.
우리 나이 스물여덟 살 때부터 저는 끔찍한 죽음들을 보며 살았습니다. (사)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아래 유가협)의 사무국장을 5년 동안 했을 때 운동과 관련되어 누군가 죽거나 군대건, 경찰서이건 의문사한 사건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제게 연락이 왔습니다. 어찌나 많은 죽음들이 동생의 죽음 뒤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으면 경찰이나 안기부(현 국정원), 군보다 빨리 손을 써야 합니다.
저들은 유가족들에게 접근해서 유서를 확보해서 공개 못하게 하거나, 가족장을 치르게 압박하고 회유해서 그런 죽음들이 갖는 정치적 파장을 최소화하려고 합니다. 온갖 거짓 약속과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 거기에 평생 안정적인 취직자리까지 제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서둘러 화장을 하면 끝입니다. 시신과 현장의 사진이라도 충실히 남겼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말입니다.
현장에서는 늘 긴장해야 합니다. 슬픔을 느낄 여유가 없습니다. 빨리 상황을 파악해야 하고, 냉정하게 그 죽음의 의미를 간파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의 인권현장은 이처럼 죽음이 있는 곳이거나 국가에 의해 폭력이 자행되는 곳이었습니다. 가급적 현장을 지키면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던지며 외쳤던 그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폭력이 있는 곳에서 그 폭력의 피해자들의 아파 우는, 때로는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목소리를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주 잡혀가고, 감옥도 여러 번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동생의 몫까지 싸우겠다고 약속한 유가족 활동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일에 매달리는 것도 그 연장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두 분 곁으로 돌아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올해로써 대학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 분 모시면서 고향에서 올바른 뜻을 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독히도 더러운 세상은 그 뜻마저도 이렇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습니다. 왜지요? 사람들은 너무나 자기 안속만 차립니다. 기성세대들도 마찬가지고 청년학생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박래전 열사 유서 중)
동생 유서의 한 대목입니다. 대학을 마치고 부모님 모시고 농사를 짓고 시를 쓰고 싶었던 만 스물다섯의 청년의 꿈을 포기하게 만든 그때의 현실만큼이나 지금의 현실도 엄중합니다. 비록 촛불항쟁의 끝에 새 정부가 들어서서 많은 부분 변화가 있다고는 하지만 안타까운 죽음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드러나는 죽음도 있지만 삶의 벼랑 끝에 몰려서 죽어가는 이들도 있고, 세월호 참사처럼 국가에 의해 구조받지 못하고 죽는 죽음들도 있습니다. 더는 아픈 죽음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30년을 쉼 없이 달려왔지만 저는 아직 그런 세상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 강고하기만 하는 각자도생 죽음의 구조,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정의가 헌신짝처럼 내던져지는 현실을 많이 바꾸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아직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못난 형입니다.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