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신암선열공원에 모셔져 있는 조기홍 독립지사의 묘소. 조 의사도 대구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했다.
정만진
창원의 25세 청년 박창오도 창원공립보통학교 훈도 조영기, 청년 손조동, 김두석, 김두봉, 김상대, 박순오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흑우(黑友)연맹 운동을 하다 1928년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갇혔다. 그 역시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1934년 세상을 떠났다.
경북 예천에서 1932년 11월 비밀결사 무명당(無名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김기석 지사도 출옥 이후 1년 만에 세상을 떴다. 일제의 지독한 고문은 서른살 청년의 목숨도 참혹하게 앗아갔던 것이다.
25세, 30세 청년 지사들도 고문 당해 순국계성학교 5학년 때 대구3.8만세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대구대학교 설립자 이영식도 대구형무소에서 감옥을 살았다. 대구에서 3‧.만세운동을 한 뒤 칠곡 인동의 진평교회에 숨어지내던 이영식은 3월 13일 400여 군중을 이끌고 마을 뒷산에 올라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는 궐석 재판에서 6개월의 실형을 언도받았으나 서울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국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6개월 동안 수감됐다. 출옥 후 그는 일본인 경찰서장에게 '살고 싶으면 얌전히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경고문을 보냈다가 대구형무소에서 또 다시 1년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