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C에서 방송된 리얼리티 TV쇼 '어프렌티스'는 트럼프를 전국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어프렌티스
<어프렌티스>의 주요 흥행요소는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는 데 있다. 누가 봐도 가장 먼저 해고될 듯한 사람을 살려둔 채, 전혀 예상치 못했던 후보를 향해 '넌 해고야!'를 날림으로써 시청자의 허를 찌르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극중 역할은 대통령이 된 현재까지 정치적 자산이 되어주고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백악관에서 여전히 쇼의 진행자를 보고, 트럼프 자신도 마치 쇼를 진행하듯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그가 느낌표를 붙여 수시로 날리는 격정적 트윗은 과거의 방송만큼이나 극적 효과를 연출한다.
심지어 외국의 지도자들까지 트럼프를 <어프렌티스>의 틀에서 바라본다. 그를 대할 때 '고도의 협상가'라는 두려운 이미지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거래의 기술>이라는 책까지 썼지만 (정확히는 토니 슈워츠라는 대필작가가 썼다.) 실제로 그가 탁월한 협상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항상 물음표가 따라 붙는다.
올해 초 <어프렌티스>의 제작진 두 명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 쇼는 사기극이었다'고 고백했다. 그 '리얼리티 쇼'가 '리얼리티'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트럼프가 회고록을 썼던 1980년대 후반이나, 방송에 나와 화려한 집무실을 배경으로 경영수완을 과시하던 2000년대 초는 '거래의 기술'을 과시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1990년대에 초 트럼프의 사업은 30억불(약 3조 2천억 원)의 부채에 시달렸고, 운영하던 세 개의 도박장이 파산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방송출연 때까지도 회사는 큰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그에게 회생의 기회를 준 것은 '협상 능력'보다는 오히려 '방송 출연'이었다.
트럼프는 자신을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게 만드는 재능이 있으며, 대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오락매체는 그에게 더 없이 좋은 수단이 되었다. 과거에 <어프렌티스>가 하던 역할을 이제는 트위터가 해주고 있다. 그가 '객관적 중재자'를 자임하는 다수의 언론과 사사건건 싸움을 벌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통제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트럼프가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한 뒤 다시 번복하는 이유에 관해 중요한 단서를 준다. 그는 상황을 온전히 주도하는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용보다는 형식이다.
트럼프가 북미회담을 취소한 시점은 불과 3주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러면서 단 한 가지 이유를 들었다. 자신은 김정은 위원장을 정말 만나고 싶었으나, 북측의 최근 성명에 담긴 "엄청난 분노와 공개적인 적의" 때문에 이 시점에서 회담을 갖는 게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 그동안 미국과 북한이 주고 받던 '말폭탄'에 비하면, 이번 북한 논평에서 드러난 '분노와 적의'는 경량급에 속하기 때문이다. 편지에서 말한 북한의 발언이란 최선희 부상이 펜스(부통령)를 "아둔한 얼뜨기"로 지칭한 것을 일컫는다.
지난해 가을, 북미 대화 분위기가 감지되던 상황에도 김정은은 트럼프를 겨냥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제 할 소리만 하는 늙다리에게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까지 했었다. 트럼프도 질새라 트위터에 "나는 김정은에게 '짧고 뚱뚱하다'고 안 하는데 왜 그는 내게 '늙다리'라고 욕하는지 모르겠다"고 응수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그 뒤에 따라붙은 글귀였다.
"어쨌든 나는 그와 친구가 되기 위해 무척 애쓰고 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그러다가 올 1월에는 또다시 설전이 오갔다. 트럼프는 다시 트위터에 '북한 지도자 김정은이 자기 책상 위에 핵버튼이 있다고 한다'며, "이 쪼들리고 굶주린 정권에서 온 누군가 그에게 좀 말해주면 좋겠다. 트럼프 책상 위에는 더 크고 강력한 핵버튼이 있고, 이건 제대로 작동하기까지 한다고!"
이런 상황까지 겪은 트럼프가 자신도 아닌 펜스가 모욕당했기 때문에 회담을 취소했다는 말이 믿어지는가?
우려되는 미 정부의 대북 인식 부족북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에 앞서 펜스가 북한을 향해 쏟아낸 발언도 시기나 내용 면에서 적절하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가 폭스뉴스에 나와 "북한이 미국과 충돌하면 리비아 모델의 최후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북한 지도자도 카다피처럼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 발언은 볼튼의 '리비아 모델' 발언이 북한의 심기를 잔뜩 자극한 상태에서 나왔다. 오죽하면 보수방송의 진행자조차 놀라 "그건 협박 아니냐"고 물었을까. 펜스는 태연히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답했다. 당사자의 의지에 달린 미래의 사태를 '사실'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