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비 거리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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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100년도 더 된 나지막한 건물들이 길게 늘어선 이 거리엔 한때 100여 개의 가게들이 몰려있을 만큼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른 곳에선 찾아보기 힘든 음식과 물건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도 리버풀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살아가는 곳이자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흑인 공동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리버풀도, 그랜비 거리도 조금씩 활기를 잃어갔다. 산업구조의 변화도 한몫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항구도시는 점점 설자리를 잃어갔고, 경기침체가 이어지면서 실업률도 가파르게 치솟았다. 급기야 1981년 폭동이 벌어지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상점들도 문을 닫고, 빈집이 늘어갔다. 절망감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이 절망의 고리를 끊고자 주민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1993년 그랜비주민협의회(Granby Residents Association)가 꾸려졌다. 이들의 바람은 소박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물들이 남아있는 거리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 그리고 공동체와 함께 지역의 빈 공간들을 어떻게 다룰지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90년대 내내 파괴는 계속되었고, 결국 그랜비 거리에서 옆으로 뻗어나간 4개의 작은 길들인 비콘스필드(Beaconsfield st.), 케언스(Cairns st.), 저민(Jermyn st.), 듀시(Ducie st.)만이 겨우 살아남았다. 차 2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이 4개 길의 길이를 모두 더하면 900m 남짓이다.
주민협의회는 리버풀 시의회를 끈질기게 설득해 이 '그랜비 4개 길(Granby Four Streets)'에 있는 집들은 철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러나 지역을 되살리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했고, 빈 집들은 다시 몇 년간 그대로 방치된다. 2002년 영국 정부가 무려 22억 파운드(약 3조 400억 원)을 들여 빈집을 매입한 뒤 철거하는 '주택시장 재건(HMR, Housing Market Renewal)' 프로그램을 도입하자 시가 다시 철거에 나서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주민협의회는 물러서지 않았다. 힘든 싸움이 계속되었고, 주민들도 지쳐갔다.
꽃을 심는 마음으로 희망의 씨를 뿌리다
▲주민들이 거리에 가져다 놓은 식물들
www.getintothis.co.uk
▲주민들이 꾸민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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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은 작은 일부터 해보기로 했다. 삽과 붓을 챙겨 거리로 나갔다. 커다란 통에 꽃을 심어 거리 곳곳에 놓았고, 건물 벽엔 담쟁이를 올렸다. 유리가 깨져나가 철판으로 덧댄 창엔 커튼과 꽃병을 그려 넣었고, 봄과 여름엔 달마다 '거리 시장(Street Market)'도 열었다.
"우리는 이곳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아직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그즈음 '주택시장 재건' 프로그램은 중단되었고, 주민들은 2011년 11월 '그랜비포스트리츠 공동체토지신탁(Granby Four Streets Community Land Trust)'을 꾸렸다. 주민이 직접 지역의 자산을 맡아 되살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시의회는 입찰을 통해 민간 건설업체에 일을 맡기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주민들과 마주 앉을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토지신탁(CLT, Community Land Tr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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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주민들에게 집과 공동체 시설을 적정한 가격에 영구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만든 공동체 기반 비영리 조직으로, 주로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한다.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신탁 받되, 토지 위에 세워진 건물의 가치는 분리한다. 건물의 소유주에게 장기로 토지를 임대(lease)하거나, 알맞은 가격에 세(rent)를 준다. 토지는 무상으로, 또는 낮은 가격에 제공을 받거나, 필요하면 시장가격에 사들이기도 한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 건물 소유주가 건물을 되팔려 할 때도 가격을 고정시킴으로써 영구적으로 적정한 가격에 건물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며,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토지의 가격 상승도 억제한다.
'그랜비포스트리츠 CLT'는 지역 주민과 관심을 가진 지역 내 단체의 성원들 약 1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구성원이 되려면 1파운드로 주식을 사야 한다. 의결권은 1주 1표가 아닌 1인 1표의 원칙을 따른다. 8명(12명까지 가능)의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이사회의 관리ㆍ감독을 받으며 이사회는 연례 총회에서 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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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주민들은 시의회에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심을 가진 주택조합(Housing Association, 싼 가격에 사회적 주택을 공급하는 민간 비영리 조직)들과 자금을 마련해줄 것 그리고 몇몇 자산들을 공동체토지신탁이 맡아 되살릴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다행히 두 주택조합 LMH와 Plus Dane Housing이 나섰고, 여러 기금들로부터 1400만 파운드(약 200억 원)를 모았다. 어느 사회적 투자자가 공동체토지신탁에 50만 파운드(약 7억 2000만 원)를 무이자로 빌려주기도 했다.
시가 소유한 빈 집을 단 돈 1파운드(약 1400원)에 내놓은 리버풀 시의 파격적인 정책(Houses for one pound)도 한몫 했다. 빈 집을 고쳐서 5년간 거주하는 조건이었다. 고치는 데 드는 비용을 감안하면 반값 정도에 내 집을 가질 수 있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