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소설과 영화원작 <헛간을 태우다>가 수록된 단편집 《반딧불이》
문학동네 & KMDB
35년 만의 부활, 그리고 변신
영화 <버닝>의 원작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이다. <헛간을 태우다>는 1983년 작이다. 1983년생 일본 문학이 근래 한국영화로 장르를 바꿔 입고 프랑스 칸까지 순례를 떠났다 온 셈이다. 그렇게 하루키의 소설은 35년 만에 현재 우리나라에서 열렬히 재조명을 받는 중이다.
소설은 영화로 부활하면서 색채도 많이 달라졌다. 소설 속 화자였던 유부남은 상실감에 허덕이는 청년으로 바뀌었고, 그저 정체가 묘연하다는 것 외에 아무런 특징도 없던 '위대한 개츠비'는 의뭉스러운 금수저로 변모했다. 그나마 본래 모습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 '그녀' 정도랄까.
소설 안에서는 "헛간을 태우겠다!"는 범행 계획만 있었던 것이, 주체와 대상은 달라졌지만 어쨌든 영화 안에서는 실제 방화로 진화했다. '그녀'와 교류만 했던 화자는 영화에서 '교감'을 하는 남자로 거듭난다. 우리의 '위대한 개츠비'는 발음상 'Barn(헛간을 뜻하는 영어)'과 '燔(태울 번)'을 연상시키는 듯한 '벤'으로 번듯이 이름까지 갖게 되었다.
이렇듯 인물과 상황을 설정하는 얼개만 살펴봐도 원작 소설은 영화 <버닝>과 결이 아주 다르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적인 차이가 필연적으로 내용의 차이까지 야기한다. 그리고 바로 이 내용상의 차이들이야말로 영화 <버닝>을 보기 전에, 혹은 그를 감상한 후에라도 관람객 입장에서 알아두면 좋을 법한 비평거리들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와의 차이 ①] 방화 이유 내용 측면에서 원작 소설과 영화의 유일한 공통점은 '한 여성이 실종한다는 점', 그리고 '두 달에 한 번씩 헛간을 태운다는 그 남자가 영 미심쩍다는 점', 그 두 가지뿐이다. 1980년대 초반, 이 모티프로부터 무라카미 하루키는 2018년대의 이창동 감독과 같은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꾸려냈다.
'그레이트 개츠비'는 자신의 모럴리티(도덕성)를 유지하기 위해 가끔 헛간을 태운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 존재의 모럴리티는 인간의 상반되거나 이질적인 면모들을 균형 있게 만듦으로써 유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과식을 하는 인간인데 단식을 즐기기도 한다. 이지적인 인간인데, 그는 때때로 감성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평소에는 정숙한 인간이 간혹 '불금'이나 '불토'에 일탈을 만끽한다. 이런 인간들은 '그레이트 개츠비'가 보기에 모럴리티를 유지하려 애쓰는 인간들이다. 평소에는 준법 시민이지만, 두 달가량 한 번씩 범죄를 저지르는 본인처럼 말이다.
그 남자에게 헛간은 소멸시켜줘야 할 대상이다. 그는 말한다. 세상에는 스스로 타버리기를 원하는 존재들이 있다고. 그리고 그래야만 비로소 그 가치를 다하는 존재가 있게 마련이라고. 자신은 그들의 바람에 부응하면서 헛간들의 모럴리티를 유지시키고, 본인의 모럴리티도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이다.